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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호 2021년 5월] 뉴스 기획

잊을 수 없는 은사, 피천득·김학준 교수님

111년 전 태어난 스승과 제자를 곤경에서 구해준 교수 이야기
잊을 수 없는 은사님

111년 전 태어난 스승을 기리는 모임이 있다. 모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동문들로 구성된 ‘금아 피천득 선생 기념사업회’가 그것. 시인이자 수필가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피천득 선생은 1946년 서울대 영어교육과의 설립자 중 한 명이자 교수로서 30년 동안 후학을 양성했다. 졸업 후 반 세기가 지났건만,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은 여전히 애틋하다. 변주선(영어교육60-64) 동문의 주도 아래 은사의 삶과 문학을 조명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이를 엮은 책도 펴낸 것. 그중 이성호(영어교육58-62) 한양대 명예교수의 글을 요약해 옮겼다.

한편 전영기(정치80-84 본지 논설위원) 시사저널 편집인은 4월 23일 열린 동창신문 편집회의에서 잊을 수 없는 은사님으로 김학준(정치61-65) 전 인천대 이사장을 꼽았다. 김 전 이사장이 모교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각별한 은혜를 베풀어줬다고. 학생운동하다 잡혔을 땐 군에 강제징집되지 않도록 선처를 호소했고, 언론사 입사시험 칠 땐 운동 이력 때문에 면접에서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등 제자를 감싸준 일화가 흥미로웠다. 더 자세한 사연을 동문들과 함께 듣고자 원고를 청했다.


1967년 이성호 동문의 대학원 졸업식 사진. 앞줄 오른쪽이 이성호 동문, 왼쪽이 피천득 교수.

‘미가 곧 진리, 진리가 바로 미’ 가르쳐 주신 피천득 선생님

이성호 영어교육58-62
한양대 영문과 명예교수

피천득 교수님과 나와의 관계를 회상하면서 시인 금아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부분적이나마 해보고자 합니다. 사적인 이야기가 많이 끼어들겠지만, 그런 이야기가 그분의 문학 텍스트를 유의하게 또는 즐겁게 읽는 데 작은 보탬이 되길 희망합니다.

나는 학부 때 5과목, 대학원 때 2과목 선생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영국 낭만주의 시강독’이었습니다. 콜리지의 ‘늙은 어부의 노래(The Rime of Ancient Mariner)’는 놀랄 만큼 환상적이었습니다. 결혼식으로 향하는 세 하객 중 한 사람을 마술에 걸듯 붙잡아 놓고 늙은 어부가 벌이는 경험담입니다. 안개 속에서 어선을 따라오는 큰 새 앨버트로스는 가상스러운 신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 어부는 이 새를 활로 쏘아 죽입니다만.

나는 이 앨버트로스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새로 알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렇게 일러주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부리가 길고 날개가 3미터가 넘지만 날갯짓을 하지 않고도 어선을 따라다니고 지구를 돌아다닐 수 있는 신비의 새, 그러니까 초기 낭만주의 시의 신비성을 한몸에 지닌 그런 새였습니다.

그러나 실망스럽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최근에 이 새는 뉴질랜드 근처에 실제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보들레르가 자신의 처지를 비유하여 ‘앨버트로스(L’Albatros)’라는 시를 쓰고, 골프에서도 이 새의 이름을 고유 용어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도 이 새는 선생님 덕분에 적어도 나에겐 신비한 상상의 새로 계속 남을 것 같습니다.

내가 대학에서 강의할 때 자주 인용하는 두 구절이 있는데, 하나는 선생님이 설명해주신 “미가 곧 진리요 진리가 바로 미”라는 경구이고 다른 하나는, 선생님이 자세히 설명해주셨지만, 워즈워스가 말한 “시는 강렬한 느낌의 자생적 넘쳐흐름(Poetry is the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이라는 명구입니다. 소설을 강의하면서도 시에 대한 이런 관심을 놓지 않게 지도해주신 선생님께 나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피천득 선생님은 예이츠의 시에 큰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그리스의 미녀 헬렌이 등장하는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장미(The Rose of the World)’ 그리고 특별히 예이츠가 그의 연인 모드곤과 헤어지기 전 바닷가를 함께 거닐 때 그녀가 ‘죽어서 갈매기가 되고 싶다’고 말한 후에 쓴 시 ‘흰 새(The White Birds)’를 열강하셨습니다. 강의 중에 예이츠의 청혼을 거절하는 모드곤의 제스처를 직접 연기해 보이시기도 했습니다.


피천득 교수

나는 사범대학 졸업 후 공군 항공병학교에 입교했습니다. 임관을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습니다. 먼저 사시던 댁보다는 상대적으로 마당이 넓은 동교동 자택이었습니다. 마당에는 여러 가지 꽃이 피어 있었는데 아마도 ‘꽃씨와 도둑’을 여기서 쓰지 않으셨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서재는 여전하였습니다. 서양 사람들처럼 크리스마스 카드를 진열해 놓길 좋아하셨습니다. 특히 산타를 기다리는 한 소녀가 벽난로 안을 들여다보는 카드를 좋아하시던 기억이 났습니다.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사진이 자리를 조금 옮겨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훈련 당시 4월 초인데도 진눈깨비가 내리던 저녁에 포복을 하던 이야기를 열심히 했고, 선생님은 아마도 제가 휴학을 한 대학원 이야기를 하신 듯합니다. 조금 후에 안방으로 옮겨 저녁 식사를 겸상으로 맞았습니다. 정갈하게 차린 작은 밥상을 사모님이 직접 들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인사 겸 감사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의 정중한 감사의 마음이 제대로 전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선생님을 다시 뵙게 된 것은 4년여의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였습니다. 선생님은 내가 학부를 다닐 때 당시의 주임교수이셨고, 내가 대학원 석사과정에 복학했을 때에는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학과장이셨습니다. 용두동과는 달리 동숭동에서의 만남은 그래서 더욱 새로웠습니다.

세상살이가 늘 그렇듯이, 나도 강의와 보직을 하면서 외국을 들락날락하느라고 선생님을 오랫동안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일보사 앞에서 우연히 만나 뵈었습니다. 그 건물 2층에 있는 다방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선생님은 비엔나커피 두 잔을 주문하셨습니다. 아이스크림이 한 스쿠프씩 들어있었고 더구나 그 커피 향이 아주 향기로웠습니다. 선생님은 찻잔을 자주 들어 커피는 거의 들지 않으시면서 그 향기를 즐기셨습니다. 선생님은 틀림없이 커피 향을 좋아하셨습니다. 선생님이 강의하실 때마다 서양 문화의 배경을 설명해주시던 모습이 새삼 떠오릅니다. 미모의 헬렌과 장미, 자만한 모드곤과 갈매기, 일상을 말하는 프로스트와 자연, 외경을 말하는 워즈워스와 낭만, 죽음을 말하는 에머슨과 정의, 이런저런 서구의 특질들이 금아 시인의 글쓰기에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을 다시 해봅니다.

그러나 그 심층에는 우리 모어(母語) 문화의 정(情)이 흐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 정은 맑은 샘물 같이 솟아오르는 서정시가 되었습니다. 맑고 정결한 그리움의 노래였습니다. 이런 정결함과 간절함은, 많은 후학들이 동의하듯이, 일찍 돌아가신 그분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함께 생각해봅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시인이 만기에 쓰신 두 시 ‘새’와 ‘너’에 주목합니다. 여기의 새가 서양 문화에서처럼, 앨버트로스는 아니더라도 자유스러운 ‘갈매기’인지 또는 우리 문화의 단아한 ‘학’의 확대인지 모르지만, 그 새는 틀림없이 시인이 끊임없이 갈구해온 깔끔한 진주색 새일 것 같습니다. 키츠의 말을 빌리자면 그 새는 단아한 ‘아름다움’ 그 자체일 것입니다. 깃털 하나 남기지 않고 잠시 머물다 산뜻하게 떠나는 아름다운 새일 것입니다.




1983년 3월 강원도 묵호항에서 찍은 정치학과 80학번 졸업여행 사진. 아랫줄 맨 오른쪽이 김학준 당시 학과장, 아랫줄 맨 왼쪽이 전영기 당시 과대표. 전 동문의 동기 유홍림 모교 사회대학장(뒷줄 맨 왼쪽)이 어렵게 찾아 제공했다.

무기정학·강제징집 막아준 김학준 선생님

전영기 정치80-84
시사저널 편집인

김학준(정치61-65) 선생님은 필자가 1980년에서 1986년까지 사회대학 정치학과에서 학부와 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할 때뿐 아니라 첫 직장인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해 정년을 마치고 올해 ‘시사저널’로 옮길 때까지 고비마다 나를 구원하여 주셨던 은사님이시다.

1980~1986년은 신군부 권위주의 통치에 저항하는 학생운동과 시위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관악캠퍼스엔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진동했다. 사복형사의 무리들과 정보기관에서 파견나온 요원들이 득실거렸는데 사회대학 8동 대형강의실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낭랑하게 퍼지던 김학준 정치학과 교수의 ‘한국 정치론’, ‘소련동구 정치론’ 등 강의는 절망과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서울대 학생들에게 청량제 역할을 하였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선생님의 강의 어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감성은 이성이 모르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이승만의 아시아적 전제군주의 의자는 무너지고 말았다”, “혁명이란 단어가 모든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하던 시대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김 선생님 역시 당시 40세 전후의 열혈 지식인이었고, 20대 때 정권의 용공조작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던 국가폭력의 피해자였으니 혁명사와 정치학이라는 메타포로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려는 마음이 담긴 말씀들이라고 생각한다.

얘기를 개인사로 좁혀 보면 1982년, 3학년 2학기 때 나는 정치학과 과대표이자 서울대의 지하 운동권 서클의 일원이었다. 운동권은 이른바 ‘제도권 진입 투쟁’을 결의하고 그 일환으로 사회대의 차기 학도호국단장을 운동권 출신으로 세우기로 했는데 이를 위해 사회대학 대의원 회의를 소집해 사회를 보는 역할을 내가 맡았다. 당연히 이 모든 과정은 불법이었다. 당시 정치학과장인 김학준 교수가 경고를 하였고, 나는 “사회를 보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한 뒤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대회를 열어 운동권의 학도호국단 진입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김학준 교수

사회대학이 발칵 뒤집혔다. 이 때문에 내게 최소한 무기정학에 강제징집 조치가 취해질 게 불보듯 환했다.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연로한 부모님에 대한 걱정, 군경에 붙잡혀 당하게 될 폭력이 두려워졌다. 나는 며칠 학교를 안 나가고 피해 다녔다. 그 사이 김학준 학과장은 사회대학장과 서울대 본부 당국에 온갖 호소를 하며 구명운동에 나섰다. 연락을 받아 학과장실로 찾아뵈었더니 선생님은 “자네, 나한테 왜 거짓말을 했나. 남자답지 못한 것 아닌가”라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무기정학과 강제징집 조치는 취하지 않기로 했으니 학업에 정진하기 바라네”라고 했다. 그 사이에 김 선생님이 나를 위해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김학준 선생님은 학과의 다른 제자들을 위해서도 비슷한 일을 많이 하셨다. 선생님의 구제와 사랑도 감사하지만 “왜 사람이 거짓말을 하나”는 주의는 환갑을 맞은 지금까지 필자의 가슴에 금언으로 새겨져 있다.

김학준 은사의 나를 구원한 스토리는 그 뒤에도 이어졌다. 1987년 가을, 나는 중앙일보 입사시험에서 1, 2차에 합격했는데 문제는 3차 면접이었다. 서울대 학적부에 ‘보안사 남상사’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기입된 ‘시위전력자’라는 빨간 기록 때문에 나는 이미 한 해 전 석사장교 시험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시절이기에 언론사라도 중앙일보가 나를 배척할 수 있다는 걱정이 있었다. 김학준 선생님과 상의했더니 그는 대뜸 내 손목을 잡고 바로 서소문의 중앙일보사로 데려가는 게 아닌가. 선생님은 회사 앞에서 나를 기다리게 하고 바로 중앙일보 주필을 만나러 올라갔다 30여 분 만에 돌아왔다. 희망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중앙일보 주필께서 ‘자네를 시위전력자라는 이유로는 떨어트리지 않을 테니 실력대로 시험을 치르라’고 하셨네. 소신껏 해보게.”

그 뒤 나는 입사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33년이 훌쩍 지났다. 오늘 수십 년간 마음에 품어두었던 스토리를 공개함으로써 스승의 사랑과 은혜를 되새기고자 한다. 김학준 은사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