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호 2024년 6월] 뉴스 기획
6월 호국의 달 : 동문들이 말하는 한국 전쟁 속 외국인 영웅
미국 로버트슨 차관보와 프랑스 몽클라르 장군
6월 호국의 달 : 동문들이 말하는 한국 전쟁 속 외국인 영웅
한미동맹의 산파 로버트슨…상호방위조약 체결에 결정적 기여
이승만 대통령과 12차례 회담
정권축출 대신 상호합의 일궈
“월터 S. 로버트슨 미 국무부 극동문제담당 차관보는 우리 현대사의 숨은 영웅입니다. 한미 양국 대통령의 입장 차를 좁히고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어요. 그 덕분에 우리나라는 지난 70년 동안 북한의 남침을 억지하고, 튼튼한 안보 위에서 빛나는 발전을 이룰 수 있었죠. 그분을 널리 알리고 오래 기억하자는 뜻에서 작년 6월 기념사업회를 출범시켰습니다.”
신승일 로버트슨기념사업회 회장은 1957년 모교 화학과에 입학했다가 1962년 미국 브랜다이스대에 다시 입학해 학사,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엔개발계획에서 국제백신연구소 설립을 기획하고, 그 연구소가 모교 연구공원에 유치되는데 앞장섰다. ‘암곡학술기금’ 10억원을 모교에 기부했고, 2017년 모교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5월 30일 잠실 롯데호텔 카페에서 신 회장을 만났다.
“국내보다 해외에 거주한 시간이 더 많기에 조국의 발전을 더욱 실감합니다. 이를 가능케 한 한미동맹의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죠. 로버트슨 차관보가 아니었다면 한국은 물론 미국에도 불행한 역사가 도래했을 겁니다.”
1953년 5월 29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중앙정보부(CIA)·국무부·국방부·합동참모본부 등 5개 부처 고위급 관료들이 참석한 합동회의에서 이승만 정부의 전복을 꾀하는 에버레디(Ever-ready) 작전이 논의됐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조속한 종식을 내걸고 당선됐으나, 휴전 회담을 시작하고 2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진척이 없던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강력히 휴전을 반대했기 때문. 에버레디 작전의 핵심은 이 대통령을 구금하고 계엄을 선포, 유엔사령부 휘하의 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작전이 1952년 7월 기획된 바 있었고, 미국에 우호적인 백선엽 참모총장이 마침 워싱턴에 와 있었다. 에버레디. 이름 그대로 언제든 준비된 상태였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결론이 정해진 회의 분위기를 180도 뒤집었다.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한국 정부를 접수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입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철저한 반공주의자란 점에서 로버트슨 차관보는 이승만 대통령과 통했습니다. 다른 고위급 인사들이 이 대통령을 ‘고집불통 늙은이’로 치부할 때 그는 조국의 독립과 안보를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진정한 애국자라고 평가했죠. 중국 주재 미국 대리 대사를 지냈던 로버트슨 차관보는 중국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미국이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을 몹시 아쉬워했어요. 한반도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로버트슨 차관보와 이승만 대통령.
신 회장은 영화 ‘오펜하이머’를 예로 들어 국제 공산당의 무서운 속성을 설명했다. 핵폭탄 개발이란 극비 프로젝트 내에도 공산당 관계자들이 다수 발견될 만큼 깊숙이 침투했고, 그로 인해 2차 세계대전 승전의 주역 오펜하이머 박사도 사상 검증을 받았다고. 평등사회란 슬로건으로 숱한 지식인을 매료시켰지만, 현실정치로 이전될 땐 예외 없이 독재 체제로 변질한 공산주의의 속성을 로버트슨 차관보도 절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소신 발언으로 에버레디 작전은 폐기됐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때만 해도 한국과 미국의 격차는 다윗과 골리앗 아니겠습니까. 세계 최강국이 극동의 빈곤국과 동등한 지위에서 조약을 체결해줄 리 없었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동맹이 아닌 ‘한국 방어’ 성명과 군사지원 행정 협정, 10억달러 경제 원조를 제시했습니다. 이 대통령은 단칼에 거절했죠. ‘조약’이 아니면 안보를 확보할 수 없다고 봤어요. 그 와중에 1953년 6월 8일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포로 송환문제가 타결됩니다. 한미동맹 없이 휴전이 임박하자 이 대통령은 수만여 명의 반공 포로를 석방해버리죠. 휴전 회담을 무산시킬 의도로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정신착란자’라며 이승만 대통령을 맹비난했지만, 이 대통령은 굴하지 않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없이 휴전을 맞으면 북한에 공산군이 증강되고 또다시 침략을 자행할 게 뻔했기 때문. 로버트슨 차관보는 반공 포로 석방 직후 대통령 특사로 급파돼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두 사람은 20일 동안 12차례 회담을 진행했다.
“처음 8일 동안은 이 대통령이 미국을 맹비난하는 데 시간을 다 썼다고 합니다. 한일 합방 및 한반도 분단과 관련한 미국의 실책을 조목조목 따졌다고 해요. ‘슈퍼 갑’을 상대로 웬만한 배짱 갖곤 못할 일입니다. 그걸 경청했던 로버트슨 특사도 대단하죠. 워싱턴에서 진전이 없으면 철수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렸는데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통령은 끝내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내는 친서를 통해 휴전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약속과 함께 한미동맹 조약 초안을 제시했다. 12차 회담 다음 날인 1953년 7월 12일, 서울과 워싱턴에서 상호방위조약, 포로 문제, 한국의 자유·독립·통일을 위한 공동 노력 등에 합의한다는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이 대통령 축출 작전을 취소시킨 당사자가 특사로 내한해 20일간 머물면서 이룩한 합의다. 한미동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로버트슨 차관보는 당시로선 매우 드물게 진보적인 휴머니스트였습니다. 그때 고위급 인사들은 대부분 백인 우월주의나 식민 시대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의 언동에선 인종차별적 요소가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이 대통령과 합의를 이뤄가는 과정에서도 1대 1로 존중했고, 그의 철저한 반공주의 정신과 의지를 높이 평가했죠. 로버트슨 특사가 파견된 것은 우리에게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경태 기자
“계급장 떼고 온 프랑스 장군 몽클라르, 한국전쟁 전환점 만들었죠”
양평 지평리서 중공군 대파 영웅
국내 전기 발간하고 추모전 열어
이미 ‘별이 셋’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초급장교로 활약하고, 2차대전에서 자유 프랑스군으로 종군했던 육군 중장. 당시 나이 58세, 갓 예편해 안락한 여생을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국의 전쟁터로 향했다. 유엔군 대대급 지휘관은 중령만 가능하다기에 스스로 계급까지 낮췄다. 만류하는 만삭의 아내는 “곧 태어날 아이에게 아버지가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긍지를 물려주고 싶다”고 설득했다. 한국전쟁의 영웅 프랑스의 랄프 몽클라르 장군 얘기다.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보가 한 나라를 살렸다. 1951년 2월 13~15일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 서울·양평·홍천·횡성·여주를 연결하는 중부전선 요충지인 이곳에서 기세등등 밀고 내려오던 중공군과 수세에 몰린 아군이 맞붙었다. 몽클라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대대와 미군 23연대로 구성된 유엔군 5000여 명은 3일간 근접전투와 백병전 끝에 중공군 3개 사단 3만명의 파상 공세를 격퇴했다. 처음 중공군에 승리한 유엔군은 단번에 자신감을 회복해 북진할 수 있었다. 전세 역전이란 점에서 또 다른 인천상륙작전에 비견할 만했고, ‘중령 계급장을 단 장군’의 활약은 후세의 가슴을 울렸다. 15년간 지평리 전투와 몽클라르 장군을 알려온 김성수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 대표를 5월 28일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양평이 고향이신가 했는데…” “전혀 관계 없습니다.” 사시(8회) 합격 후 국제거래·국제중재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던 김 동문이 지평리 전투를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2004년 운영하던 변호사 사무실 자료를 정리해 양평 용문의 한 건물 서고에 보관했다. “우연히 마을을 걷다 전적비를 봤어요. 6·25때 격전이 있었다는데 동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거예요. 육사 출신 친구가 일본에서 나온 6·25 전쟁사 책을 구해주기에 읽어보니 굉장히 중요한 전투더군요. 미국에서도 ‘Coldest winter’ 등의 책에서 비중 있게 다뤘는데 우리만 잘 모르고 있던 거예요. 3일이란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진데다, 국군은 지휘관 없이 카투사만 참여해서 그랬나 싶었죠.”
몽클라르 장군부부와 자녀
지인 10명과 ‘지평리를 사랑하는 모임’을 꾸려 지평리 전투 관련 자료를 찾고 미국에 있는 전투 생존자를 수소문했다. 곧 군인, 기업인, 언론인 등이 가세해 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모두 양평에 땅 한 뙈기 없는 사람들이다. 전투에 참여한 이들 중 유독 몽클라르 장군이 누군가와 겹쳐보였다. “전쟁 영웅의 3가지 코드가 있어요. 목숨을 거는 자세, 맡은 업무에 대한 철저함, 공포를 극복하는 용기. 몽클라르 장군이 갖춘 이 덕목을 바로 이순신 장군이 갖고 계셨죠. 계급과 무관하게 백의종군한 것, 부하를 아끼고 소통하려 하는 모습도 유사했고요. 이 얘길 했더니 한 언론에서 ‘푸른 눈의 이순신’이라고 칭하더군요.”
몽클라르 장군은 ‘뼛속까지 군인이면서도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프랑스 외인부대 지휘관을 지낼 때 새로운 대원이 들어오면 미리 그 사람의 나라에 대해 공부하고 그 나라 말로 대화를 시작했답니다. 자신도 헝가리에서 프랑스로 온 이민자 집안이라 그 마음을 알았던 것 같아요. 한국에 오기 전 전국을 돌며 직접 모병했는데 외인부대 출신만 800여 명이 모였죠. 전장에선 멀리서 망원경을 들고 지시하는 대신 총탄이 쏟아지는 참호에 나와 병사들을 독려하고, 중공군의 야간 피리에 위축되지 않게 수동 사이렌을 울리게 했어요.” 사기 충천한 프랑스 대원들은 지평리 전투의 전초전인 쌍굴 전투부터 ‘총검 돌격’을 감행하는 용맹함으로 보답했고, 계속된 패퇴로 침체됐던 미군까지 고무시켰다.
2010년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안느 여사와 연락이 닿아 한국에 초청했다. 참전을 결심했을 때 부인의 태중에 있던 그 아이다. ‘아버지의 전기를 썼는데 발간할 곳이 없다’는 말에 번역 작업을 거쳐 ‘한국을 지킨 자유의 전사’란 제목으로 한국에서 먼저 펴냈다. 사진과 유품 등을 제공받아 추모전도 열었다.
“프랑스에서도 옛 영웅으로 잊혀져 가던 차에 한국의 관심이 너무 감사하다고 하셨죠. 따님은 3년 전 타계하고 남편 듀포 대령과 지금도 교분이 있습니다. 장군의 모교인 상시르 육군사관학교에 갔더니 교장이 자신도 ‘몽클라르 반’에서 공부했다며 장군이 쓰던 군모 복제품을 선물하더군요. 하나는 양평에 기증하고, 하난 강연할 때 들고 다녀요. 마치 장군이 옆에 있는 듯 든든해요.”
묵묵히 펼쳐온 지평사모의 활동에 드디어 응답이 왔다. 지난해 지평리 남한강변 자전거 도로의 3421m 구간을 국가보훈부가 ‘몽클라르의 길’로 지정했다.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군이 딱 3421명. 기존의 ‘지평의병 지평리전투기념관’보다 더 심도 있게 지평리 전투를 다룰 양평역사박물관 건립도 추진된다. 그는 “지자체가 지평리 전투를 문화의 일부로 받아들인 것 같아 뿌듯하고, 지평사모의 활동을 잘 계승해주면 좋겠다”며 “양평 특산품 ‘지평막걸리’가 처음 생산된 지평양조장이 바로 지평리 전투 때 프랑스 대대본부로 몽클라르가 지휘한 장소였다. 이 인연을 살려 콘텐츠로 발전시키면 어떨까”라는 제안을 했다. 지평리 전투의 또다른 주역인 미군 23연대장 프리먼 대령에 대한 책도 준비 중이다.
귀국 후 군인 재활병원 원장을 지냈던 몽클라르 장군은 무공훈장을 받고 1964년 나폴레옹이 묻힌 파리 앵발리드의 지하 묘역에 잠들었다. 몇 해 전 김 동문은 그곳을 찾아 ‘한국을 도와줘서 감사하0다’고 인사했다. “파리에 가실 때 한 번쯤 들러 장군에게 인사해 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개선문에도 한국전에 참전한 프랑스 대대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찾아보세요. 지평리 전투를 생각하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