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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호 2021년 3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나눔은 어려울 때

신희영 대한적십자사 회장


나눔은 어려울 때




신희영

의학74-80
대한적십자사 회장·모교 의대 명예교수


코로나로 더 힘들어진 취약층
모교 동문이 함께 도와줬으면


얼마 전 서울대병원에서 내가 치료하던 열두 살 난 어린이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전공이 소아암인 만큼 평소 많은 아이들을 진료했는데 그중 하나가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는 내 소식을 듣고 편지를 쓴 모양이었다. 돌봐주어 고맙다는 내용의 글과 그림이 어찌나 예쁘던지, 손으로 꾹꾹 눌러쓴 흔적이 역력한 편지를 보면서 코끝이 시큰했다. 아이는, 나중에 커서 나처럼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의사로서 환자를 진료하는 행위는 매우 당연한 일인데 그런 예쁜 마음이 담긴 편지를 받으니 그저 감개무량할 따름이었다. 나눔은 소소한 행위로도 특별한 감정을 자아내는 힘이 있다.

나눔도 재미있고 즐거운 행위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나는 약 30년 전인 1991년에 백혈병어린이후원회를 설립하고 MBC와 함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이란 이름의 프로그램을 만든 적이 있다. 당시 제작진과 함께 개발한 캠페인 활동, 예를 들면 마라톤 1m에 1원 모금, 레고 탑 쌓기 등은 참신한 방식으로 많은 시청자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고, 그렇게 모인 모금액은 소아암 환우들을 위해 소중하게 쓰였다.

대한적십자사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이러한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나온 것이 ‘천사 바이러스’와 ‘마즐따 증후군’이다. 천사 바이러스에 감염된 우리는 사랑과 배려, 봉사를 실천하게 되고, ‘마’음이 ‘즐’겁고 ‘따’뜻해지는 ‘마즐따’ 증후군을 겪게 된다.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은 증상이다. 이런 상상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요즘 내 고민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기분 좋은 상상은 언제나 의미 있는 발전을 이룬다. 코로나19의 창궐에 맞서 적십자는 ‘1004 바이러스 확산’ 캠페인을 전개했다. 1004원씩 기부 받아 취약계층에게 마스크를 나눠주는 캠페인이었다.






또한 지금은 매출이 줄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소상공인에게 후원금을 지원하고, 소상공인은 취약계층을 위한 도시락을 만들어 제공하는 ‘1004가 전해주는 황금도시락’ 모금캠페인이 많은 호응을 받고 있다. 그 밖에도 고액기부자클럽 RCHC(Red Cross Honors Club 1억원 이상 고액 개인 기부자)와 RCSV(1억원 이상 고액 기부 단체), 씀씀이가 바른 기업 캠페인(월 20만원 이상 정기후원 기업) 등 사회적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돌이켜 보면 나눔의 정신은 이미 우리 사회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의료진의 헌신과 위험을 무릅쓴 시민들의 자발적인 봉사활동, 재난 성금 중 역대 최고액을 기록한 코로나19 모금, 혈액 수급 위기 사태에서 기꺼이 생명을 나누는 헌혈자의 모습처럼 말이다. 어려운 때일수록 함께 힘을 모으고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다.

적십자에 와서 느낀 점은 우리 사회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다는 사실이었다. 취약계층을 돕기 위한 이런저런 정책들이 있지만, 정부와 지자체, 몇몇 단체의 노력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어렵다. 게다가 장기화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에서 보듯이 현대사회 재난의 양상은 갈수록 복잡하고 다양해져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독거노인, 조손가정, 노숙인 등 소외된 이웃들의 처지는 더욱 가혹해지고 있다.

적십자의 기본 이념은 나눔 정신을 전파하는 데 있고 그 시작은 작은 실천에서 비롯된다. 끝을 알 수 없는 새로운 위기를 극복하려면 나눔의 가치를 되새기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눔을 실천하는 데 어떠한 자격 조건이 있을 리 없고 특정 직업군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작은 위로를 건넬 줄 알고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면 충분하다. 그 어느 때보다 소외된 이웃에 대해 각별한 관심이 요구되는 때이다. 이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는 일에 우리 동창회원들이 함께해주길 진심으로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