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3호 2022년 8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라이너 쿤체 상·이미륵 상을 연이어 받고
라이너 쿤체 상·이미륵 상을 연이어 받고
전영애
독문73졸
모교 독문과 명예교수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한 시상식
1년 넘게 준비한 축사 듣고 감동
과분하기만 한 큰 상 둘을 독일과 한국에서 연이어 받는 일이 얼마 전에 있었다. 감사의 마음이야 이루 말할 수 없으려니와, 상에 대하여 새롭게 생각해 보는 기회도 되었다. 한국에서 받은 ‘이미륵 상’도 독일인들 그리고 독일과 관련이 많은 분들이 주시는 것이어서 그랬지만, 특히 독일에서 받은 ‘라이너 쿤체 상’이 그러했다. 여러 해 전에 독일에서 비슷한 상을 받으면서도 많이 놀랐던 터라, 내가 겪은 수상식 행사의 진행을 조금 전해 보고자 한다.
상을 무슨 이름 붙은 날이나 어떤 기회에 주는 것이 아니고, 오롯이 단 한 사람을 위하여 하룻저녁을 다 비워 사람들이 모였다. 오래 놀랍도록 성심껏 준비되는 그 자리는 그럼으로써 매우 뜻깊은, 성대하고 격조 높은 문화의 장(場)이 되었다. 행사의 중심은 물론 축사와 감사의 답사인데, 특히 축사(라우다치오)의 경우가 놀라웠다. 수상자의 업적을 잘 평가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 의뢰되는데, 1년쯤 전에, 심지어 2년 전, 적어도 반 년 전에는 섭외를 하는 것 같았다. 수상자의 감사의 말 역시 축사와 상 자체의 정당성을 담보하고 그럼으로써 상의 권위도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문학상의 경우에는 중요한 작가연구 자료가 된다.
예전에 독일 바이마르에서 ‘괴테 금메달’을 준다는 소식과 더불어, 축사하는 분으로 내가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괴테 연구가의 한 분이 정해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라서 곧바로 옥스퍼드로 달려간 일도 있었다. 독일 괴테학회의 시상식 전통에 대한 짐작이 좀 있는지라, 그분이 일면식도 없는 미미한 나에 대해서 무얼 쓰자면 얼마나 고심하실까 싶어, 독일에서 나오지 않은 책들을 한 보따리 꾸려 들고 간 것. 갔다가 나는, 유서 깊은 퀸스 칼리지에서 과분한 동료 대접만 누리고 돌아왔는데 시상식에서 나의 연구를 꿰뚫는 말씀을 듣고 있자니, 이분이 대체 나의 책을 얼마나 읽으신 건가 싶어 그저 입이 벌어졌다.
이번 ‘라이너 쿤체 상’ 시상식에서도 축사를 듣는 내내 나는 정말이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바이마르의 유서 깊은 안나 아말리아 도서관 관장을 지내신 분이 하셨는데, 내가 쓴 책, 논문을 얼마나 찾아 읽으셨는지, 한국어를 알 리 없는 분이 나의 ‘파우스트’ 번역에서의 난관 극복 방법을 예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꺼내어, 먼 극동과 독일을 연결하며 독문학자로, 번역가로, 시인으로, 시와 학문을 “아름답게” 아울러온 생애를 이야기하고 독일어로 쓴 나의 시 한 편을 인용하여 적절하게 해설하고는, “수상자에게는 수상한 것을, 시상자인 욀스니츠 시에는 이런 수상자를 가진 것을 축하”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욀스니츠 시는 우리나라 태백 같은 아주 작은 옛 광산 도시인데, 그곳 출신인 큰 시인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들어 좋은 시인들에게 시상함으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우리 충무시가 윤이상 기념사업들로 세계 음악가들 사이에서는 알려진 것과 비슷한 사례다.
그런데 독일에서 나온 내 책들을 다 읽은 사람은 축사를 하신 분만이 아니었다. 시상식에 앞서 현지 도서관에서 고등학생들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걱정하며 갔다. 그런데 복도에서부터 한국 관련서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학생들을 만나니 더욱 놀랐다. 학생들이 내 책을 두루 찾아 읽고 몇 가지 주제를 뽑아서 그에 따라 각자 우선 작품을 하나씩 만들었다. 이 작품들은 나중에 시상식장에 전시되었다. 진행도 자기들이 해가는데 질문 수준이, 경험하지 못했을 만큼 높았다. 왜 안 그렇겠는가. 평생에 걸친 나의 주제를 뽑아내고 그 주제로 작품까지 만들었는데.
시상식 자체는 더욱 놀라웠다. 대체로 독일의 저명한 시인들이 받아온 상이라 나는 많이 떨면서 갔는데, 큰 홀이 매우 아름답게 꾸며졌을 뿐더러 수상자가 한국인이라고, 가야금 연주를 넣었고 선곡까지 세심했다. 윤이상, 황병기 곡에 우리 가곡 ‘동심초’가 더해졌다. 시장이 직접 베를린 한국문화원을 찾아가서 부탁했다고 한다. 이어진 뷔페 음식까지 한식 반, 독일식 반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도 홀 뒤쪽에 마련된 식사를 하며, 또 다른 한 켠에 마련된, 쿤체 시인과 나의 책들이 놓인 판매대 앞에서 사인을 해주며, 시민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 독일문화원에서 열린 ‘이미륵 상’ 시상식에서 역시 나의 책들 전시대가 있었고 비슷하게 성의껏 진행되었다.
또한 놀라웠던 것은 다음날의 신문기사였다. 기자야 겨우 나의 ‘감사의 말’을 들었겠건만, 나 자신도 미처 표현 못 한 핵심이 담겨 있었다. 모든 것이 진정한 관심과 성의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낯선 사람들이 쳐준 이런 따뜻하고 큰 박수를 어찌 잊겠는가. 평생의 격려이다. 그것에 조금이나마 값하는 사람이 되려, 있는 힘 다 쏟으며 살 수밖에 없다. 상의 본디 의미는 아마도 그런 것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