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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호 2021년 2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관악춘추 오정환 MBC 부장 본지 논설위원

지난 70년에 취해 있지 않나
관악춘추

지난 70년에 취해 있지 않나



오정환
공법83-87
MBC 부장
본지 논설위원


막이 오르면 페르시아 궁전 앞에서 수심에 찬 원로들이 노래를 한다. “금빛 보좌에 앉은 우리의 군주 크세르크세스를 지켜 주소서” 황제의 그리스 원정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다. “군대는 바다와 땅 위에서 진군한다. 헬라의 창병에 맞서 페르시아 궁수들을 앞세우고 진군한다.” 드디어 도착한 전령은 살라미스 해전의 패배를 자세히 노래했다.

페르시아인들은 세계제국이 도시국가에게 패한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다. 황제의 어머니인 아톳사가 선제 다리우스의 영혼을 저승에서 불러내 물었다. 다리우스는 아들의 오만 때문이라고 답했다.

“오만의 꽃이 만발하면 미망(迷妄)의 이삭이 피고 그것이 익으면 눈물겨운 수확이 시작되오.” 배철현 전 모교 종교학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오만이 눈을 가리면 ‘본래 되었어야 할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복수(nemesis)를 한다. 그 서양 철학의 원류를 연극 페르시아인들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천년이 지난 서기 668년 한반도에서는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 지원을 요구받은 신라가 고민에 빠졌다. 김유신의 동생 흠순과 조카 인문이 원정군 장수로 임명되자 김유신을 찾아갔다. “자질이 부족한 우리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땅으로 갑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김유신은 이렇게 말했다. “백제는 오만으로 멸망했고, 고구려는 교만하여 위태롭게 되었다. 우리의 올바름으로 저들의 그릇됨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의 국력으로 볼 때 임금과 신하가 겸양하며 뭉쳤다면 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대 신라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시 그리스 시대로 돌아가면, 연극 페르시아인들은 대정치가 페리클레스의 후원으로 만들어졌다. 일종의 시민교육을 위해서였다.

객석의 아테네인들은 크세르크세스가 옷을 찢고 페르시아 여인들이 통곡할 때 가슴을 부여잡고 함께 오열했다. 고대의 전쟁이란 눈앞에서 팔을 자르고 몸을 가르는 살육전이었는데도, 적에 대한 원한보다 인간의 운명적 한계에 공감했다.

지금 우리라면 어땠을까. 고대 아테네인 신라인들처럼 스스로를 돌아보며 경계할 수 있을까. 혹시 우리는 지난 70여 년의 번영에 오만해져 눈이 멀어 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