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55호 2024년 6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平天下의 기개를 떨쳐볼 때 

이강덕 KBS N 사장·본지 논설위원
 
平天下의 기개를 떨쳐볼 때 



이강덕 (정치82-88)
KBS N 사장 
본지 논설위원

 
22대 국회 입성 동문 107명
서울대 이름 바르게 알리길



1980년대 초 대학 시절 최루탄과 백골단에 쫓기다 보니 강의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선후배 학우들과 밖에서 토론하고 세미나하는 것이 더 재미가 있기도 했다. 학생들 상당수가 그때는 그랬다. 그런 시절에도 정치학과·외교학과에는 학생들이 한두 번이라도 들어보려는 명강의들이 있었다. 쏘동구 정치론, 중국 정치, 정치과정론, 전쟁론, 외교사상 프루던스, 서구정치사상 등이다. 군더더기 없는 강의 내용보다 우리를 더욱 끌어당긴 것은 강의 중에 한마디씩 섞여 나오는 세상과 역사를 보는 통찰력 있는 혜안들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이라고 불렀다. ‘김학준 선생이 리포트만 내라고 하네’, ‘이홍구 선생, 최명 선생 댁에 세배나 가자’, ‘길승흠 선생이 주례한대’, ‘노재봉 선생이 또 핏대 냈대’ 라고 하는 것이 일상적인 표현들이었다. 사제지간이지만 선생이라는 격의 없는 표현을 학생들도 교수님들도 좋아했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저 분들의 지식 수준을 빨리 따라잡고 하산해야겠다’는 의욕을 갖게도 했다. 교수님들도 ‘내가 자네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공부는 스스로 알아서들 하는 거네’라는 말씀을 자주 덧붙이곤 했다. 어떻게 보면 ‘선생’은 그런 참스승에게 보내는 최고의 존칭이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계급장을 뗀 것 같은 허물 없는 소통’은 우리들의 호연지기를 키웠다. 법대든 사대든, 공대든, 다른 단과대나 학과들에서도 상황은 대동소이였다고 들었다.

학과에서 발간하는 학회지 이름이 ‘평천하’였다. 評天下로 쓰고 平天下로 읽었다. 세상을 비평하자는 게 아니라 ‘세상을 바로잡자’는 의미였다. 여러모로 어렵던 시절이지만 평천하(平天下)를 논하며 통을 키웠다. 그렇게 존재만으로도 기개를 불어넣어주던 선생들은 탁한 세상을 직접 바꾸겠다며 몸소 현장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독재자의 하수인이 됐다며 당시에는 제자들로부터 모질게 비난도 받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때 서울대 출신 선생들의 안목과 식견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전진시킨 것은 분명하다. 가령 김학준은 ‘보통사람 대통령 시대’를, 노재봉은 ‘6·29 선언’을, 이홍구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정원식은 ‘전쟁 막는 남북대화’를 세상에 내놓았다. 곰곰이 따져보면 平天下의 길을 나름대로 실천한 것이다.

22대 국회에 입성한 국회의원 가운데 3분의 1이 넘는 107명이 서울대 출신이라고 한다. 19대에는 132명, 20대에는 120명, 21대에는 103명의 의원이 모교 출신이었다고 동창회보는 자랑하고 있다. 지금은 대통령도 서울대 출신이다. 요즘처럼 탁한 세상에서 타협하며 계속 맥없이 지낸다면 ‘그렇게 많은 인물들이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서 도대체 한 게 뭐냐’고 후대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세상을 올바르게 바꾸는 平天下의 기개를 떨쳐볼 기회’임을 위정자들께 먼저 상기시키고 싶다. ‘지금 조국의 미래가 관악 출신에 달려있다’는 건 과언이 아니다.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