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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호 2020년 6월] 기고 에세이

6·25 전쟁 70주년 특별기고: 모교에 충렬탑 세우자

신동소 모교 농생대 명예교수, 6·25 소년학도병 참전유공자


모교에 충렬탑 세우자


6·25 전쟁 70주년 특별기고



신동소
임학53-57
모교 농생대 명예교수
소년학도병 6·25 참전유공자


우리가 어찌 잊으랴. 6·25전쟁이 일어난 지 올해가 70주년이 되었다. 이 전쟁은 민족의 비극이었으며 나라의 진운이 걸린 전쟁이었다. 국토는 초토화되고 많은 국민의 살상과 애국지사의 납치, 전쟁고아, 굶주림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참상을 남겨 그 상흔이 아직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이 전쟁이 끝나지 않고 휴전 상태이다.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60여 만명의 국민과 국군 사상자, 참전 UN군 16개국, 의료지원국 5개국 17만8,600여 명이 전사하였다. 삼가 명복을 빈다.

충렬탑은 애국의 교육장

1945년 광복을 맞이해 부흥을 겨눠볼 시간도 없이 북한군이 불시에 38선을 넘어 3일 만에 서울을 점령, 국가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이 급박한 즈음에 서울대에서 휴교령을 내렸다. 모교 출신 참전자들은 재학 중 군에 입대하여 북한군의 총공세를 감행한 격전지 포항, 왜관, 마산, 서울 수복과 방어전에 총알이 빗발치고 지옥 같은 전쟁터에 조국을 지키기 위해 청운의 꿈을 접은 동문이다. 사랑하는 제자를 전쟁터에 보낸 교수는 무훈 장성하여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며 건투를 빌었다.

전쟁 중 서울대의 상처도 컸다. 최규동 당시 총장을 비롯해 상당수의 교수도 납북되었고 전시연합대학이 부산으로 이전·설치됐다. 북한군은 침략한 지 40일도 안 된 짧은 시간에 낙동강까지 진격했으며, 방어할 병력자원은 부산 학생뿐이므로 김종원 경남계엄사령관은 부산지역 학교장에게 입영을 요청했다. 필자는 생환의 기약 없이 대문을 나서 1950년 9월 1일 소년학도병으로 자진 입대하여 훈련을 끝마치고 1950년 9월 29일 8사단 10연대에 배속됐다. 이때 전세는 백척간두의 위급한 시기라서 군에 가면 총알받이라고 했지만 전쟁터에서 적군과 교전 중 총상을 입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왔다. 필사즉생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쟁터에서 군용차를 타고 황해도 곡산 어느 산비탈 도로를 지날 때 포연이 남은 곳을 지나면서 피아 간 신분을 알지 못하는 부상자가 신음하는 소리와 광경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고통과 신음 소리로 “엄마, 나 죽어갑니다” 고향을 바라보며 애탄의 절규, 고통, 부모 형제를 그리워하면서 목숨을 거둔 전사자를 잊을 수 없다.

전사자의 부모 형제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을 치며 불러봐도 대답 없는 그 한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들의 피 흘린 대가로 평화와 자유를 누리고 있다. 우리들은 몽매간에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전쟁이 종식된 지 70주년이 되었지만, 조국을 구한 영웅들의 위국헌신에 측은지심은 들리지 않고 무심한 세월만 흘러, 아직도 충렬탑을 세우지 못했다. 충렬탑을 모교 학내에 세우면 전사자의 위국헌신으로 구국하여 평화와 소중한 자유를 수호케 하고, 나라 사랑과 안보의 초석이 되는 역사의 장이며, 천추에 빛날 영령들의 추모지가 되어, 우리들에게 평화, 자유, 애국의 교육장이 될 것이다.

충렬탑 건립 지난한 과정에 있어

우리가 잘 아는 관악캠퍼스 문화관의 대강당 로비 벽면에 ‘서울대학교 재학생 한국전쟁 전몰자비’가 설치돼 있으며, 사범대학 교정 안뜰에 전몰자비, 연건캠퍼스 서울대병원 구내에 현충탑이 세워져 있다. 그렇지만 서울대 광장에 만민이 우러러보며 국내외 방문객이 참배해 국화꽃 한 송이 바칠 충렬탑은 없다.

심지어 6·25전쟁 전사자의 기념탑이 경향 각지에 세워져 있으며, 서울고 교정, 그 외 여러 지방 고등학교 교정에도 그 기념탑이 있다. 서울대 재학생 46명(서울대소식 제527호)의 전사자가 있는 충렬탑이 세워지지 못한 것은 만시지탄의 감이 있다. 서울대 박물관 옆에 민주화 운동으로 희생된 한 학생의 기념탑은 있지만 46명의 고귀한 희생자만을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진정코 서울대 학사에 가장 우선되는 것은 그 전사자의 구국충혼을 기리기 위해 학내에 충렬탑을 세우는 것이므로 본 대학교에서 은퇴한 명예교수들이 충렬탑 건립을 추진해 왔다. 그동안 충렬탑 건립의 필요성을 2008년 10월부터 반성환 교수, 정하우 교수, 필자가 당시 이장무 총장께 직접 건의한 것부터 시작해 대학 당국과 회동, 협의했다. 명예교수협의회 이수성 회장을 위시해 최종태 교수, 이인규 교수 등의 임원 일동이 직접 이 총장께 건의하여 실현 단계에서 오연천 총장께 위임됐고 건립위원회 위원장 김태유 교수를 위촉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또 그 업무가 성낙인 전 총장으로 이르기까지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다시 모닥불을 살리기 위해 오세정 총장께 지난 2019년 5월 14일 스승의 날 명예교수 초청 행사에 충렬탑 건립을 건의하고 관련 자료를 직접 전달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이 건립사업을 총장께서 실현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했다. 이 사업이 지금까지 이뤄지지 못한 것은 그 사유가 아직도 밝혀진 바 없지만 43만 서울대 동문의 관심사이다.

2008년 10월부터 2011년 3월까지 충렬탑 건립 계획이 추진된 기록(명예교수회보 2010, 제6호) 중 중요사항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2009년 3월 23일 서울대총동창회 사무실을 방문해 박연수 사무총장께 충렬탑 건립의 필요성과 협조 요청, 2009년 9월 2일 서울대총학생회장 박진혁에게 ‘서울대학교 충렬탑 건립의 필요성에 대하여’ 취지와 협조를 당부, 2010년 1월 10일 임광수 총동창회장에게 협조 요청서 전달, 2008년 11월 17일자 서울대 대학신문 <의견> 발언대 ‘서울대 충렬탑 건립의 필요성을 제고한다’, 2009년 8월부터 수차례 서울대학교 이근관 기획부처장·총장과 많은 협의, 2010년 3월 26일 서울대 충렬탑 건립에 조선일보 사회부 조진석 기자도 신문에 필요성을 게재했다.

2010년 4월 사회 명사인 조 웅 목사도 관심을 가져 건립비용과 소요예산에 대해 부영건설과 직접 접촉한 결과를 서울대에 제시한 바 있으며, 2010년 4월 1일 조선일보(39쪽)에 필자가 ‘서울대학엔 왜 전사한 선배들의 기념물 없나’ 기고문을 게재했다. 2010년 5월 3일 대학신문에 ‘서울대학 출신 국가유공자 추모사업 논의’, 2010년 서울대소식 제526호 ‘서울대 국가유공자 동문기념사업 본격화’, 2014년 5월 15일 조선일보 기사 ‘서울대학생 전쟁나면 도망’, 이 기사는 어떤 상황에서 나온 지 모르지만 경악스럽고 동문들은 자괴할 일이다. 2014년 8월 27일 보훈처 박승훈 처장과 성낙인 총장과 ‘한국전 참전의 길’을 협의했으나 성사되지 못한 것으로 안다.

이런 지난 과정을 간략히 소개했으나 지금은 여러 명예교수들이 관망 중에 있다. 서울대 재학생의 전사자는 나라를 벼랑 끝에서 구한 역사의 주역이었다. 서울대 동문들은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생명을 바친 전사자 동문의 눈물을 닦아줄 충렬탑은 왜 못 세우는가. 역사와 전통이 있는 대학은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한 동문 전사자의 이름을 새겨두고 있다.

세계 유수대학 학내 기념관 만들어

영국 이튼스쿨, 미국 하버드대, 프린스턴대, 예일대가 전몰자 이름을 새겨 추모하고 있다. 그리고 워싱턴시티 한국 전쟁기념관에 “알지도 못한 사람 만나보지도 못한 나라 사람들을 지켜달라는 부름에 미국의 아들 딸에게 경의를 표하며” 전쟁 영웅을 잊지 않는 미국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들에게 반면교사로 국내외에서 애국심을 선양하는 데 심금을 울린 35세 김한나(김예진) 동문이 있다. 재미동포 1.5세 김한나 동문은 어릴 때 미국에 이민 갔으며 모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UCLA 조지워싱턴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으로 미국 50주를 다니면서 6·25 참전용사 할아버지들께 큰절을 올렸다. “70년 전 한국에 와서 내 부모를 지켜주지 않았으면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래서 내게 생명을 주신 할아버지와 같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라고. 2008년 ‘Remember 727’을 만들고 이듬해 7월 27일 미국 연방정부 청사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권한을 청원해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하여 입법했다. 참으로 나라 사랑에 자랑할 만한 동문이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현재 평화와 자유를 누리고 있다. 지금 이 나라는 총성은 멈췄지만 휴전 상태이며, 북한은 지금도 장사포를 쏘고 있다. 6·25전쟁의 참상과 비극을 겪지 않기 위해 국력 강화와 안보가 평화의 근간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고 경각심을 높일 말이 있다. ‘독일인은 생각한 다음 걷고 미국인은 뛰면서 생각하고 우리 한국 사람은 뛰는 도중에 뛰는 까닭을 잊어버린다’는 말이다. 우리 국민성을 나타낸 말로서 미국의 전 국방부장관 럼스펠드가 한국인의 건망증을 지적했으며 우리가 명심하여야 할 교훈이다.

6·25전쟁을 대비하지 못한 것도 한국인의 건망과 무관하지 않으며 현재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역사적으로 회고하면 임진왜란(1592년)을 겪었던 선조 2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군 8,000명을 이끌고 침략한 것과, 정유재란(1597~1598년)에 가토 기요마사가 병사 14만명을 이끌고 침략한 것과, 인조 14년 1636년 청나라 태종이 침입하여 삼전도에서 패한 역사적 비극은 조정의 사전 대비와 유비무환의 국정을 이끌지 못한 소치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임진왜란이 나기 전 선조는 전쟁에 대비하지 않았으며 희대의 정치인 이율곡이 왜적의 침입에 방비할 10만 병사의 양병을 조정에 건의했으나 무용화돼 드디어 선조 임금은 의주로 파천했다.

우리 미래는 젊은이들 안보의식

현재에서 과거를 통해 미래를 대비할 금과옥조는 오늘날에서 추앙을 받는 서애 유성룡 영의정이 지은 징비록이다. 오늘날 이 시국에 지난 잘못을 징계하지 않거나 미래의 환란을 경계하지 않고 현실을 외면하면 환란이 닥친다. 동서의 고금을 통해 쇠망의 원인은 안보의 상실이었다. 우리나라의 미래는 젊은이들의 안보의식이며 곧 평화의 근간이다. 서울대 내 충렬탑 건립은 학생들에게 호국과 안보의 초석이 되는 산 상징이 되며 애국심의 발로가 된다.

6·25전쟁은 발발 70주년이 되어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사건이 아니다. 6·25 전쟁이 나자 서울대의 전사자는 서울대학 총장의 지시와 가르침에 따랐다. 전쟁이 끝나면 복학된다는 가르침을 하늘 같이 믿고 전쟁터에 임전무퇴로 위국헌신함으로서 나라를 구했다.

서울대에 이들의 충혼을 기릴 충렬탑은 실현되어야 할 중차대한 일인데도 2008년부터 3대 총장에 이르기까지 성사되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동문에게 이념이나 진보와 보수, 좌우가 있겠는가? 우리의 운명도 생각하면서 충렬탑을 세우는 데 동참하기 바란다. 대학 학사 행정의 집행은 총장의 전결사항임에도 미결된 것은 총장인 동시에 스승이신 믿음 신(信)을 저버리지 않을 충렬탑을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사엔 매사에 때가 있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서울대총동창회가 이 성스러운 추모 사업을 제기해 검토되길 건의한다.
전사자는 영원한 동문이다. 순국한 동문의 고귀한 희생으로 나라를 구했으며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다. 그러므로 동문의 총의를 모아 46명의 전사자 영령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는 충렬탑을 본 대학교 구내에 세우는 것이 동문들에게 부여된 도리라고 생각한다. 농업생명과학대학 동문들이 현 모교 구내에 상록탑을 세웠던 사례가 있다. 서울대학교총동창회가 한뜻을 모아 길이 빛날 영웅들의 충렬탑을 세우는 과업을 추진할 것을 건의한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동문에게 이념이나 진보와 보수, 좌우가 있겠는가? 우리의 운명도 생각하면서 충렬탑을 세우는 데 동참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