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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호 2023년 6월] 뉴스 기획

“70년 전 할아버지의 희생,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70년 전 할아버지의 희생,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튀르키예·에티오피아 등
21개 참전국 후손 한국유학 도와
한국전쟁기념재단은 생활비
모교에서 기숙사·등록금 지원


튀르키예(터키) 출신 압둘라 바솔루(Abdullah Basoglu) 씨에게 한국은 왠지 마음이 가는 나라였다. 어릴 적 그와 가족들은 TV에서 ‘주몽’, ‘선덕여왕’ 같은 한국 드라마를 즐겨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너희 증조할아버지도 한국에 있었다”고 말했다. 압둘라씨의 외증조할아버지 후세인 데미르(Huseyin Demir) 씨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다.

시간이 흘러 지금 압둘라씨는 서울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전쟁기념재단의 UN 참전용사 후손 한국유학장학생으로 선발돼 서울대에서 등록금과 기숙사를, 한국전쟁기념재단에서 생활비를 지원받는다. 한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참전용사 직계후손을 위해, 한국전쟁기념재단과 협약을 맺은 대학이 함께 주는 혜택이다.

현재 모교 소속 장학생은 튀르키예 출신 압둘라 바솔루(항공우주공학 석사과정) 씨, 미국 출신 토레스 네트 모니카(Torres Net Monica·언어학과 석사과정) 씨, 에티오피아 출신 아스파우 네이선 게타네(Asfaw Nathan Getaneh·언어교육원 재학) 씨, 콜롬비아 출신 바론 빌라로보스 카밀로(Varon Villalobos Camilo·행정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씨 등 4명. 6월 초 압둘라씨와 네이선씨, 카밀로씨를 각각 만나 얘기를 나눴다. 바쁜 학기말인데도 “참전용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말에 흔쾌히 응했다.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는 각각 아프리카와 중남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한국전 참전용사를 파견한 나라였다. 네이선씨의 할아버지 아스파우 테클레마리암 합테예스(Asfaw Teklemariam Habteyes) 씨는 당시 에티오피아 황실근위대인 ‘강뉴 부대’의 소령이었다.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의 명을 받아 파병된 이들은 한국전에서 253전 253승 불패 신화를 썼다.

“그때 할아버지는 19세였어요. 지금의 저보다 어렸죠. 내년 2월이면 90세이신데 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용사협회에서 일하고 계세요. 역사 수업에서 한국전쟁을 배우기도 했지만, 제가 한국에 온 건 할아버지 영향이 컸어요. 5년 전 할아버지는 협회 사람들과 함께 한국에 다녀오셨는데, 어마어마한 변화에 기뻐하셨어요. 그리고 돌아오셔선 늘 제게 ‘한국에 가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아스파우 네이선 게타네(왼쪽)씨와 참전용사인 그의 할아버지 아스파우 테클레마리암 합테예스씨의 젊은 시절 사진(오른쪽).


바론 카밀로씨는 콜롬비아 톨리마시 경제개발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 2021년 한국으로 유학왔다. 그의 외할아버지 마르코 툴리오 바론 리베라(Marco Tulio Varon Rivera) 씨는 21세 때인 1952년 한국전에 참전했다. 배를 타고 하와이와 일본을 거쳐 부산에 도착한 콜롬비아 병사들은 혹독한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됐다. 그 중 하나는 격전으로 손꼽히는 불모고지 전투였다. “처음엔 독일 유학을 생각했지만 팬데믹이 터져서 갈 수 없었어요. 그때 어머니께서 한국을 얘기하셨죠. (어머니의) 아버지가 한국에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널 도와줄거라고요.”



바론 빌라로보스 카밀로(왼쪽)와 참전용사인 그의 외할아버지  마르코 툴리오 바론 리베라씨의 젊은 시절 사진(오른쪽).



20대 초중반의 참전용사들은 이제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고 세상을 떠난 이들도 많다. 후손들은 작은 기억의 조각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압둘라씨가 태어나기도 전에 외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셨지만, 그는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통해 몇몇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의무병이셨던 외증조할아버진 최전방에 계시진 않았지만, 가끔씩 논에서 소수의 적군과 아군이 농기구 같은 걸 들고 싸우는 걸 보셨대요. 이름이 정확하진 않은데 ‘서울 호텔’이란 고층 빌딩도 기억하고 계셨죠. 나중엔 불타버렸다고요. 작은 산골 마을에서만 사셨기 때문에 높은 건물을 보고 깜짝 놀라셨을 거예요. 당시 마을 사람들마다 별명이 하나씩 있었는데, 어찌나 한국 얘길 많이 하셨는지 ‘코렐리(Koreli·한국인)’로 불렸대요.”



튀르키에에서 온 압둘라씨.  참전용사인 그의 증조할아버지 후세인 데미르씨의 사진은 아쉽게도 화재로 소실되어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다. 


카밀로씨의 외할아버지는 “어느날 자정 불도 켜지 않은 군용 트럭에 실려 부산을 떠났고, 깜깜한 전장에 닿았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올드 볼디’(불모고지) 전투에 투입돼 중공군을 장악해야 했죠. 겨우 20살 정도인데다 가톨릭 신자였던 외할아버진 사람에게 총을 겨누는 상황이 힘드셨을 거예요. 누군가의 목숨을 뺏어야 할 때, 그의 내면에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싶어요.”

전쟁의 참상은 가족들에게도 공유하지 못할 참전용사들의 몫이었던 것 같다. 네이선씨는 “얼마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전쟁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됐다. 할아버지께 들은 것과 조금 달랐다. 그땐 내가 어리기도 했지만, 힘들었던 기억은 혼자 간직하고 싶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자유 수호’ 의지, 용맹함의 비결

먼 이국 땅에서 결사적으로 싸운 참전용사들의 활약은 전설처럼 남아 있다. ‘자신의 조국도 아닌데, 어떻게 그리 용맹할 수 있었을까’ 물었더니 다양한 답이 나왔다. 네이선씨는 “나 역시 우리나라가 순수하게 다른 국가를 돕기 위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 “에티오피아는 식민지 경험이 없는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예요. 이탈리아가 식민 지배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죠. 다른 나라의 자유를 위해서 싸울 수 있는 힘이 거기서 나온 것 같아요. 증조할아버지가 에티오피아-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하셨던 것도 할아버지에게 영향을 줬을 거예요. 늘 증조할아버지의 군모와 훈장을 가장 잘 보이는 선반에 두고 보셨습니다.”

카밀로씨는 “당시 한국에 가는 건 의무가 아니었다. 처음엔 아무도 자원하지 않았지만 외할아버지는 자유를 위해 싸운다는 말에 손을 드셨다”고 했다.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었으니까요.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는 중요한 가치가 됐고, 콜롬비아도 마찬가지였죠. 공산주의가 누군가를 억압하고 있다는 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을 거라 생각해요.”



카밀로씨가 제공한 한국전 당시 콜롬비아 참전용사들의 사진 


압둘라씨는 튀르키예에서 ‘가슴 대 가슴’이라고 불리는, 백병전에 최적화된 전투스타일을 이유로 꼽았다. “튀르키예 군사들은 1차 세계대전부터 총에 총검을 꽂고 돌진하는 근접전에 능했어요. 한국전에서도 총검 돌격으로 많은 공산군을 격파했죠. 종교적인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슬람에선 군인이 싸우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거든요.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 영광스럽게 여겼을 거예요.”

각국에 한국전 참전용사 단체가 있고 해마다 기념행사도 열린다. “튀르키예 공화국이 세워진 이후 첫 해외 파병이었어요. 1만km 떨어진 곳에서 다른 나라를 돕다가 많은 국민들이 세상을 떠났으니 의미가 클 수밖에 없죠.” 튀르키예에 한국전 참전용사 모임이 있고, 이들이 세상을 떠나면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군인으로 예우해 장례를 치른다고 했다.

에티오피아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은 공산정권 시기에 핍박을 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한국전 참전용사 협회가 활발하게 활동하며 경제적 지원 등을 펼치고 있다. “참전용사와 가족들이 ‘예카’라는 마을에 모여 살고 있고, 할아버지도 한때 그곳에 사셨어요. 지금도 열정적으로 일하며 존경 받고 계십니다.” 참전용사와 후손에게 의료 지원을 제공하는 한국계 병원이 있어, 네이선씨도 한국에 오기 전 그곳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고 했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의 한국전 참전 기념탑 앞에 선 네이선씨의 할아버지. 올해 90세인 그는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협회에서 열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70년 만에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했고 DMZ도 둘러봤던 카밀로씨의 외할아버지는 아쉽게도 지난달 9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한국에서 뵌 게 마지막이었죠. 임종을 지키진 못했지만 한국에 모실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비록 힘들었어도 한국이 아름다운 나라가 되는 데 일조했다며 자랑스러워 하셨거든요. 아직 슬프지만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가 편안하게 떠나셨다고 믿고 있어요.”


양국에 도움 되는 역할 꿈꿔

장학생들은 한국에서 경험을 발판 삼아 야심차게 미래를 그리고 있다. 네이선씨는 모교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 공부를 마치고 내년 경영대에 입학할 예정이다. “졸업 후 한국에서 일하거나, 고국으로 돌아가 한국 회사에서 일하면서 양국 관계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입학하자마자 축구부에 들어가 미드필더로 뛰고 있다. 코치님 말씀을 못 알아들을 땐 친구들이 번역해 준다”며 웃었다.

압둘라씨의 최우선 목표는 갓 시작한 석사과정을 잘 마치는 것이다. 그는 이스탄불공과대에서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했다. 할랄 음식을 구하기 힘들어 어려움도 있지만, 많은 기회가 있어 서울대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로켓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죠. 한국의 누리호처럼 튀르키예도 로켓을 개발하고 있어요. 관련 일을 하는 제 친구들이 늘 저에게 한국 로켓에 대해 물어보죠. 제가 두 나라 우주 산업의 다리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는 얼마 전엔 터키군 격전지인 용인 김량장동에서 열린 ‘튀르키예 길’ 지정 기념 행사에 다녀왔다며, “대지진을 겪은 튀르키예의 재건을 기원해주는 시민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모교에서 공공행정학을 전공한 카밀로씨는 콜롬비아의 정부 조달을 주제로 쓴 석사논문이 얼마전 통과됐다. 이달 국제기구에서 인턴십을 시작한다. 최근 UN참전국 군복 패션쇼에 콜롬비아 대표 모델로 서기도 했다. “훌륭한 교수님과 친구들 덕에 많이 배우고 성장했습니다. 여러 종교·정치·사회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라 발전을 위해선 단결해 온 한국의 아이디어를 우리나라에 도입해서 가르치고 싶어요. 교수로든 공무원으로든,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봉사하고 싶습니다.”

이들의 말에선 과거부터 이어지는 양국의 인연에 대한 무게감과 자신의 역할에 대한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 “한국에서나 에티오피아에서나, 참전용사들의 이야기가 충분히 알려진 것 같진 않아요. 그러니 오늘처럼 더 많이 이야기하고, 알려야죠.”(네이선)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닌데, 한국은 저의 외증조할아버지를 여전히 기억했고 장학금으로 존경과 고마움을 표현해 줬어요. 덕분에 튀르키예 젊은이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얻었죠. 전쟁 속 형제애가 이제 교육에서의 형제애가 된 겁니다. 멋진 변화예요.”(압둘라)

“외할아버지는 우리 모두에게 자유의 책임이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타인의 자유를 책임지려 먼 길을 오셨습니다. 한국은 그 신념을 갖고 타국 땅에 뿌렸던 씨앗이 얼마나 번성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죠. 우리도 미래 세대의 자유를 위해 불꽃을 계속 태워야 해요. 자유를 얻었지만 내면의 무지와 싸우며,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요. 자유를 존중하고 타인을 사랑했던 외할아버지처럼, 저도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카밀로)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