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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호 2021년 6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3차 대전의 서막, 6·25를 증언한다

김정옥 연출가·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3차 대전의 서막, 6·25를 증언한다



김정옥

불문51-56
연출가
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고향 간 사이 서울 함락, 징집 모면
1951년 광주서 전시연합대학 등록



1950년 6·25가 일어나기 전 4월과 5월은 뭔가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내용을 잘 모르는 ‘신탁통치’를 두고 남과 북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반탁’과 ‘찬탁’으로 갈라섰고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이남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신탁통치’를 지지하는 북한은 단독정부를 세우지 않는 게 논리에 맞는데, 남한보다 먼저 김일성이 주도하는 친공 정부가 세워졌고 남쪽에서도 이승만 반공 정부가 세워졌다. 남과 북은 신탁통치를 두고 ‘반탁’과 ‘찬탁’으로 갈라져 대립했고, 정치 체제를 두고 ‘반공’과 ‘친공’으로 갈라서 대립했다. 포츠담에서 루스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이 회동해 우리나라에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군이 나눠서 진주했을 때 이미 우리나라를 분단국가로 갈라놓을 음모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김일성의 친공 정권과 이승만의 반공 정권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김일성은 이승만 정권을 괴뢰정권이라 헐뜯었고 이승만도 김일성 정권을 괴뢰정권이라고 했다. 이승만은 반공을 내세워 북진통일을 외쳤고 김일성은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내세워 조국 통일을 외쳤다.

1950년 봄에 남한에는 총선거가 있었다. 삼선교 형님 집에 기숙한 나는 조병옥과 조소앙이 입후보한 성북구의 선거 연설을 들을 수 있었다. 김구 선생을 따라 북한에 다녀온 조소앙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군사력 증강에 광분하고 있으며 북한은 전국이 병영화하고 있다며 우리는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거기에 대비하는 것 같지 않고 그냥 구호로만 북진통일을 외치는 것 같았다. 소련군이 북한 정부에 전적인 군사원조를 서슴지 않았던 반면 미군은 명목상의 군사지원에 그친 감이 없지 않았다.

6·25가 일어나기 얼마 전에 한국을 찾아온 미국의 덜레스 특사는 38선을 시찰하고 이상 없다는 식의 말을 남기고 한국을 떠나갔다. 김일성의 북한 정부가 38선 인근에 전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데 정보통인 덜레스 특사가 ‘이상 없다’는 말은 알 수 없는 말이다. 더욱이 미국의 국무장관 마샬과 에치슨은 ‘마샬 라인’이다 뭐다 하면서 한국은 미국의 방위선에 들어있지 않다는 식의 말을 일삼았으니 청소년들도 불안했다.

북한군이 쳐들어와서 공산 세계가 된다면 우리 같은 쁘띠 부르주아는 꼼짝없이 숙청의 대상이 되지 않겠는가. 광주에서 옆집에 사는 동창인 정병익과 나는 이 무렵 자주 만났다. 지주의 아들인 정병익도 불안한 것은 나와 같았다. 우리가 반동분자(反動分子)로 몰리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정병익과 나는 청계천 3가에 있는 신문 학원에 원서를 내기로 했다. 공산권에서도 신문기자는 비교적 자유롭고 언론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대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신문 학원은 대학 2년 수료를 해야 들어갈 수 있는데 우리는 자격 미달이었다. 그래서 합격자 명단에는 빠졌으나 시험 성적이 나쁘지 않으니 등록하면 받아주겠다는 언질을 받고 광주로 내려갔다. 둘이는 광주로 내려가서 등록금을 마련하고 내일이라도 서울에 올라가려고 하는데 6·25가 일어났다.

우리는 서둘러 서울로 올라가서 신문 학원에 등록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서울은 개전(開戰) 2~3일 사이에 북한의 수중에 들어갔다.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개성에서 먹고 저녁은 평양에서 먹는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허풍이었다. 그 정반대가 된 것이다. 그때 신문 학원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오지 않고 서울에 있었다면 우리는 인민군의 의용군으로 끌려갔든지 아니면 고생하며 서울에서 광주까지 천 리 길을 걸어서 내려왔을 것이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재가를 받고 6·25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을 청원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이 김일성을 사주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소련은 북한에 충분한 군 장비를 지원했으며 반대로 미국은 한국군에게 군 장비를 거의 지원하지 않았다. 모든 정황으로 볼 때 소련은 6·25 남침을 사주했고 미국은 유도했다고 볼 수 있다. 남북은 서둘러 단독정부를 세우고 서로 괴뢰정권이라고 헐뜯었는데 불행히도 서로 비난한 것처럼 북한은 소련의 꼭두각시였고 남한은 미국의 꼭두각시였다.

김일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6·25 전쟁을 일으키지 않아야 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침공에 대비해 남침을 막았어야 했다. 불행히도 그들은 그들이 미국과 소련의 꼭두임을 모르고 6·25전쟁의 주인공이 되었다.

김일성은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까지 내려가지 않았어야 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평양을 점령하고 그 이상 압록강까지 진격하지 않았어야 했다. 중국의 삼국지를 읽으면 유인작전과 복병은 병법의 기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불행히도 그들은 서로 함정에 빠졌다고 할까…. 한국전쟁은 위장된 ‘3차 대전’의 서막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1951년 광주에서 전시연합대학에 등록했고 다시 서울대학교 문리대 불문과에 입학해서 문리대 구덕캠퍼스에서 불문학 강의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살아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