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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호 2020년 6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뭉쳐서 남 주자

강경희 조선일보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뭉쳐서 남 주자



강경희
외교84-88
조선일보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올 초 코로나 와중에 TV조선에서 방영한 오디션 프로그램 ‘미스터 트롯’이 국민들 사랑을 엄청나게 받았다. 여기서 상위에 뽑힌 트롯맨들이 학교 교실을 무대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는데 이 교실의 급훈이 ‘불러서 남 주자’다. 열심히 노래 불러 다른 사람들 기쁘게 해주는 게 목표인 학교다.

이 슬로건은 서울대인(人)이기도 한 한동대 설립자 고 김영길 초대 총장의 ‘공부해서 남 주자’를 떠올리게 했다. 작년에 별세한 김 전 총장을 몇 년 전에 만나뵌 적 있다. 학창 시절 ‘공부해서 남 주나’란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란 세대로서 ‘공부해서 남 주자’는 그의 교육 철학은 뒤통수를 때리는 듯한 깨달음을 줬다. 일곱 글자 중에 딱 한 글자 바꿨는데 그 의미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났다.

혈기 왕성한 10대에 닭장처럼 좁은 교실에 갇혀 재미 없는 암기식 공부를 머리에 쑤셔넣어야 하니 어지간한 인내심과 절제력 아니면 해내기 힘든 게 한국식 입시 공부다. 엉덩이 들썩이는 제자나 자녀들을 눌러 앉히면서 어른들은 “나 좋자고 공부하라는 거냐. 다 너희들 잘 되라고 하는 얘기”라고 끝도 없이 공부 이기주의(利己主義)를 강조했다. 고 김영길 총장은 1995년 2월부터 19년간 한동대를 이끌면서 ‘공부해서 남 주자’ ‘세상을 변화시키자(Why not change the world?)’ 같은 ‘공부 이타주의(利他主義)로 대학에서의 인성 교육을 특히 강조했다. 21세기에는 창의적인 지식 교육과 함께 정직·성실 같은 인성 교육이 필요하다는 교육 철학이었는데 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간 발상이던가.

‘공부해서 남 주나’ 시대의 서울대인은 또래보다 조금 나은 참을성을 발휘한 덕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시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던 ‘공부 이기주의의 승자들’이다. 그래서인지 이 이기적인 경쟁자들이 학연 따지며 똘똘 뭉치는 건 혹 가진 자들끼리 더 가지려는 담합 행위처럼 비쳐질 수도 있어 타 대학 동창회에서는 활발한 모임이 오히려 서울대 동창들끼리는 덜 활성화된 측면도 있다.

일벌레로 소문난 신임 이희범 동창회장의 취임 일성이 배움도, 교류도 활발하게 일어나는 동창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동창들끼리 더 자주 뭉치게 만들고 모교와도 끈끈한 유대를 강화해 나가겠다고 한다. 나라가 잘 되려면 서울대 학생들이 ‘공부해서 남 주나’ 대신 ‘공부해서 남 주자’의 가치관으로 재무장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울대 동창회도 ‘우리끼리 뭉치자’에 그치지 말고 ‘뭉쳐서 남 주자’를 모토로 의미있는 모임과 교류를 확대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