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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호 2020년 5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미안함 대신 뻔뻔함 권하는 사회

방문신 SBS 논설위원·본지 논설위원

미안함 대신 뻔뻔함 권하는 사회


방문신

경영82-89
SBS 논설위원·본지 논설위원


우리가 흔히 겪는 상황이다. 4명이 단체여행을 가기로 했다. 9시 출발 기차표를 끊은 뒤 역에서 8시 반에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1명이 아무 연락도 없다. 휴대폰은 꺼져 있다. 약속했던 9시 기차는 떠나갔다. 성질 급한 놈은 욕도 튀어나오는 순간, 지각자의 모습이 보인다. 이때 지각자의 반응으로 본 상황 2제(題).

<상황1> 헐레벌떡 뛰어오면서 “정말 미안해. 휴대폰으로 알람을 맞춰 놓았는데 밧데리가 아웃돼 알람이 안 울렸어. 놀라 허겁지겁 왔는데 휴대폰 방전으로 전화조차 할 수 없었어. 너무 미안해”

<상황2> 어슬렁 걸어오면서 “살다 보면 늦을 수도 있는 거지. 늦었다고 내가 사과까지 해야 돼? 너희들은 약속 때 5분 늦은 적 한 번도 없어?”

지각한 사람이 <상황1>의 반응을 보이면 “아이구 바보같은 놈”하며 뒤통수 한 대 치는 것으로 끝난다. 미안함의 상식과 이를 받아들이는 상식이 통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2>는 다르다. 미안해야 할 사람이 딴 소리를 하기에 집단 스트레스가 확 올라간다. 뻔뻔함에 일행의 멘탈은 무너지고 말싸움이 격해지다가 파탄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제도와 상식이 자리를 잡은 선진사회일수록 <상황2> 같은 뻔뻔함은 통용되기 어렵다. 그런 류의 사람도 적다. 그러나 우리 권력 주변의 정치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개인 일탈을 제도 탓이라고 퉁치기, 내 큰 잘못을 남의 작은 잘못을 빌미로 덤터기 씌우기, 사람 동원해 윽박지르기, 불편한 진실은 조작이라고 우기기, 사실관계가 틀리면 그런 건 중요치 않다고 돌려치기 등등.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이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소리 지르니 오히려 주변이 놀라 움찔하는 사례가 적잖다. 뻔뻔함이 신념으로 포장돼 있으면 합리가 낄 자리는 더더욱 없어진다. 순진한 다수는 처음에는 분노하다가 뻔뻔함이 일상화되면 그 힘을 현실로 받아들인다. 더 나아가 따라하려 든다. 윗물의 ‘뻔뻔함’이 아래로 스며 드는 것이다. 잘못해도 ‘일단 잡아떼야 살아남는다’는 이상한 학습효과가 사회에 만연해질 수 있다.

‘뻔뻔함 권하는 사회’의 결과, 전 국민이 <상황2>처럼 행동하면 그 파장은 어떻게 될까? 상식의 파괴, 가치의 혼란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그 사회적 대가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사회의 자정제 역할을 해왔던 미안함과 염치마저 몰아내고 있는 이 ‘뻔뻔함의 바이러스’야말로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회적 바이러스’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