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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호 2020년 2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바이러스보다 두려운

김영희 한겨레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관악춘추

바이러스보다 두려운


김영희
고고미술사88-92
한겨레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다. 실제 이번 ‘코로나19’를 포함해 동물과 인간이 모두 걸리는 ‘인수공통감염병’은 감염경로를 밝히기가 어렵다. 끊임없이 숙주 안에서 계속 변이를 일으키는 바이러스 특성상, 인류가 쉽사리 ‘완전정복’을 선언할 수도 없는 법이다. 자연계에 미지의 바이러스는 170만 종류가 존재하고 그 절반 정도는 인간에게 유해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한다.

그러니 ‘과잉공포’는 오히려 대응을 어렵게 할 뿐이라는 전문가들의 호소가 아무리 이어져도 한편에선 필요 이상의 ‘과잉대응’이 반복되는 현상엔 불가항력적 측면이 있다. 다만, 인류의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며 그 공포를 조금씩 줄여나갈 뿐이다. 여전히 혼란이 있지만, 2015년 메르스 사태와 비교해 우리 사회 감염병에 대한 인식 수준과 시민들 협조가 상대적으로 높아지고 차분해진 것은 분명하다.

사실 더 무서운 것은 그 공포 속에서 민낯을 드러내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아닐까 싶다. 코로나19를 겪으며 일부에서 중국인에 대한 경계감을 넘어 혐오로까지 번졌던 현상만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우한 교민의 임시생활시설을 둘러싼 갈등은 착잡했다.

아산·진천 일부 주민들의 초기 반발이 감정적이었던 건 분명하지만, 그들에게 ‘무식한 지역 이기주의자’라거나 ‘혐오론자’라고 딱지 붙이는 일각의 시선 또한 정당한가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실제 아산·진천 주민들 대다수가 우한 교민들이 오는 것을 반대한 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 지역이 서울이었다면 어땠을까?

국가의 공공의료시설 부족 속에 늘 격리시설의 부담을 떠안는 건 지역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놓는 사회구조와 인식 속에서 지역과 지역주민은 점점 주변화, 소수계층화된다. 어딘가 닮지 않았나. 같은 단지 아파트 안 임대주택에도, 같은 일을 하는 비정규직에게도, 장애인이나 동성애자 등 소수자에게도, 이들의 요구가 나올 때마다 ‘분수에 맞지 않는 과도한 이기심’으로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언젠가 한 장애인단체 활동가로부터 우리 사회 장애인 차별인식은 ‘무지’에서 시작된다는 말을 들었다. 장애인들을 일반인들에게 ‘보이지 않는’ 외딴 시설에 격리하는 대신 지역사회에 섞여 살도록 하는 국가에선 차별인식이 자연스레 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공포는 인간이 완전정복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인간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차별과 혐오는 인간의 의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게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