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호 2024년 8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은퇴 뒤 당신의 테마는
은퇴 뒤 당신의 테마는
김영희(고고미술사88-92)
한겨레 편집인·본지 논설위원
한겨레 편집인·본지 논설위원
페루로 1년 자원봉사 떠난 남편
하고픈 일 하는 ‘황금기’ 롤모델
지난해 정밀검진을 받을 일이 있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가 “아직 젊어 MRI 검사에 건강보험 적용을 할 수 없다”는 말을 몇 번씩 하는데 딴 것보다 그 ‘젊다’라는 말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50대 중반은 애매한 나이다. 직장에선 어느덧 남은 선배들이 손꼽힐 정도인 ‘노땅’으로 분류되지만,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은 창창하다.
‘백세 시대’란 말이 보통명사가 된 요즘, 은퇴 후 삶을 안내하는 강좌나 책들이 쏟아진다. 사실 ‘순리대로 살아라, 건강을 챙겨라,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하게 살아라’ 같은 조언들이 그동안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집에 사는 사람이 지난해 정년을 맞으며 ‘은퇴 후 삶’은 남의 일이 아니게 됐다.
남편은 정년을 5년 앞둔 2018년, 급여를 아껴 별도의 적금을 붓기 시작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곤 노후자금을 마련하는구나 내심 흐뭇해했는데, 웬걸. 은퇴하면 혼자 세계 여행을 떠날 비용이라고 선언했다. 정년 이후 자신에게 돈 벌어오기를 요구하지 말라고 선을 긋기도 했다.
솔직히 억울했다. 앞으로 몇 년을 ‘소녀가장’으로 살아야 하는 아내를 두고 저런 계획이나 세우다니. 그런데 일찍부터 ‘나이 듦’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갖고 틈틈이 공부를 해오며 관련 책까지 썼던 그의 주장은 너무나 논리정연했다. 대체로 사람은 70대 중반을 넘어가면 활동력이 크게 떨어진다. 정년인 60살 이후 10~15년이 노후 30년 가운데 가장 의미 있는 시기다. 노동과 가족 부양의 의무에서 해방된 동시에 몸과 마음의 활기가 충분한 때이며 원하는 것을 해볼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다. 또 중장년이 경험이나 경륜을 살린 재취업을 하기는 쉽지 않으며, 불규칙하거나 열악한 일자리일 때가 더 많다. “지금부터 씀씀이를 줄여 필요한 비용을 모으는 게 낫지, 그 황금기를 얼마 되지 않는 수입과 통째로 맞바꾸고 싶진 않다”는 남편의 말을 반박하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부부 모두 일정 규모의 국민연금 수급이 보장돼 있고, 홑벌이가 돼도 생계를 걱정할 필요는 없는 여유가 있기에 가능한 선택이라는 사실은 부인 못 한다.
지난해 말 통계에 따르면, 2022년 60살 이상 취업자 수는 585만8000명으로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매달 발표되는 고용동향에서도 다른 연령대의 취업자 수가 감소하거나 소폭 증가할 때 이 연령대만 가장 큰 폭으로 늘고 있다. 열악한 사회안전망 속에서 생계 자체가 어려운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지 않음에도 힘들어하는 ‘중산층 은퇴자’들이 적잖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알아주는’ 직책에 있던 중장년 남성들이 ‘직함 및 관계 금단 현상’을 보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은퇴 후 삶에 대한 준비와 훈련이 안 됐기 때문이다. 남편은 퇴직 몇 해 전 코로나 덕에 재택근무를 주로 하며 혼자 지내는 연습을 한 게 행운이라고 말한다.
제2의 삶에서 열정, 능력, 쓰임새가 다 일치하는 일을 찾는다면 베스트다. 재미와 보람, 돈벌이까지 가능하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정말 해보고 싶은 테마에 대한 ‘열정’이 우선 아닐까. ‘나이 듦’과 ‘외국어’ 공부를 제2의 테마로 생각해온 남편은 몇 해 전 국민내일배움카드를 이용해 무료로 한국어 교원 3등급 자격증을 따뒀다. 퇴직 뒤엔 요양보호사 자격을 따는 한편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자원봉사를 하더니, 얼마 전엔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이 파견하는 자원봉사단에 선발돼 1년간 일정으로 페루로 떠났다.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더 멀리 가 살아보고 싶다는 목표까지 성취한 셈이다.
생각해보니 그가 적금을 붓기 시작한 게 지금 내 나이다. 제2의 테마 찾기, 지금부터라도 서둘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