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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2호 2020년 1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베네수엘라 권력의 비밀

전영기 중앙일보 논설위원 칼럼
관악춘추

베네수엘라 권력의 비밀


전영기
정치80-84
중앙일보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우리 대학교의 1982년 입학 학번인 김대호 동문(사회디자인연구소 소장)은 최근 저서 ‘7공화국이 온다’의 서문에서 베네수엘라 권력의 이면사 하나를 발굴해 소개했다. 200여 년 전 이 나라를 세운 혁명 영웅 시몬 볼리바르가 47세에 결핵으로 죽기 한달 전, 대통령과 총사령관직을 사임하면서 쓴 편지 내용이다.

“나는 12년간 통치하면서 몇 가지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일신을 혁명에 바친 사람들은 바다에 쟁기질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 나라는 필연적으로 고삐 풀린 대중의 손에 들어갔다가 그들도 모르는 사이에 시답잖은 폭군들 차지가 될 것이다. …만약 어떤 국가가 원초적인 혼돈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바로 남아메리카가 될 것이다.”

이상과 열정이 시간이 흐르면서 탐욕과 분열로 허무하게 부서지는 건 혁명의 대체적인 패턴이다. 혁명 앞에 겸손하지 않고 권력의 사악한 속성을 안이하게 생각해 거기에 빨려 들어가다 보면 어느새 나라는 두 쪽 세 쪽으로 갈라지고 국민은 빈곤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평생 ‘바다에 쟁기질’이나 했다는 볼리바르의 절규는 얼마나 구슬픈가.

오늘날 베네수엘라는 볼리바르의 혁명 후계자를 자처한 차베스, 마두로 두 대통령의 집권 20년만에 거지 나라가 되었다. 이 기간 중 인구의 15%가 가난과 억압에 나라를 떠났고, 한 해에 국민 평균 몸무게가 10kg 이상 줄어들었다. 선거로 당선한 차베스 집권세력은 ‘반미 민중주의’, ‘21세기 사회주의’로 체제 변경을 선언하였다.

그 뒤 대통령 권력을 활용해 기존 대법원을 해체하고 사법비상위원회라는 걸 새로 만들어 판사 수백명을 교체했다.

비판적인 최대 민영방송을 폐지하는가 하면 신헌법의 제정으로 구입법부를 해산시키고 자기 입맛에 맞는 제헌의회를 설치하였다. 차베스는 2005년 연동형 비례대표제 선거법을 도입했는데 제1야당이 총선에서 보이콧하자 이를 집권당의 의회 지배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활용했다. 석유 회사를 비롯한 주요 민간기업은 다 국유화했고, 사립 교육기관 역시 국공립으로 바꿔 버렸다. 마지막으로 선거관리위원회를 장악하여 선거 일정과 선거법 운용을 집권당이 원하는대로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회주의 일당 독재가 완성되었다.

베네수엘라가 좀비 나라가 되어도 권력이 유지되는 비밀은 전 국민을 거미줄처럼 엮은 4만개의 지역 주민자치조직에 있다고 한다. 중앙 정부나 지방 정부는 주민자치조직을 통해 소속 대중에게 지원금을 뿌려 주고, 대중은 그 보답으로 정권을 지지한다. 정권과 군중의 생계형 유착이 좀비 권력의 생존 방식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