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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2019년 11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21세기의 선비와 사무라이

이용식 문화일보 주필·본지 논설위원

21세기의 선비와 사무라이

이용식

토목공학79-83
문화일보 주필·본지 논설위원

벌써 2019년을 돌아봐야 할 시간이다. 어느 한 해 중요하지 않은 시기가 없지만, 대전환기에는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지금이 그런 때다. 국내의 여러 어려움들에 더해 4차 산업혁명,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선거민주주의 위기 등 글로벌 격변이 중첩하면서 세계는 산업혁명과 근대화 이후 250여 년 만에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변모 중이다. 이 시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앞으로 수십 년, 수백 년 국가의 흥망이 좌우된다. 여기에 당대 지식인의 역사적 책임이 있고, 그 중심에 서울대인의 역할이 있다.

역사는 지혜의 창고다. 19세기 중반 조선과 일본의 사정은 엇비슷했다. 조선의 조정과 왕실, 일본의 천황과 막부 모두 시대적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개방에 저항했다. 그런 지배층과 달리 일부 변화에 눈 뜬 중간 계급이 나름대로 개국 운동에 나섰다.

조선의 선비와 일본의 사무라이는 의외로 닮은 측면이 많다. 중간 계급으로서 체제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식인으로서 스스로 수양하면서 다른 사람을 계몽했다. 선비는 붓을 지니고 유학을 섬겼지만, 사무라이는 칼을 차고 무사도를 갖췄을 뿐이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납치된 강항 같은 유학자들이 에도 막부에 성리학을 전해주었고, 칼에 의지했던 사무라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선비는 조선을 근대화로 이끄는 데 결국 실패했고, 사무라이는 1868년 메이지 유신을 주도해 국가를 급속한 근대화로 이끌었다. 선비들은 만절필동(萬折必東)식으로 중국에 대한 절개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사무라이들은 쇄국으로는 서구 열강을 이길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대안을 찾아냈다. 불과 20~30년 만에 근대화의 우등생과 낙오자로 갈렸다. 그 뒤 일본이 군국주의로 흐르고, 조선을 강점하고, 태평양 전쟁과 패전에 이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한국은 일본에 100년 뒤져 근대화에 나섰다. 경부고속도로 착공, 포항제철 설립이 모두 1968년이다. 그래도 반세기만에 기적적으로 선발 산업국가들을 따라잡았다. 서울대 동문들이 지대한 역할을 했음은 물론이다. 때로는 굴욕을 삼키면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 도움도 받았다.

다시 흥망의 기로에 섰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다시 나빠졌다. 공교롭게도 한국 정부는 명분론적 대응에 치중하고, 일본은 실용적 현실적 접근을 앞세운다. 선비와 사무라이의 21세기 형(型) 재현이다. 지식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선비와 사무라이의 장점을 배워야 한다. 조선 말기의 실패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할 서울대인의 책임이 다시 막중해진 국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