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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호 2019년 4월] 문화 미술산책

미술산책 15 암브로시우스 보스하르트 ‘창턱에 놓인 꽃병’

꽃 이야기
미술산책 15
암브로시우스 보스하르트 ‘창턱에 놓인 꽃병’

꽃 이야기

글 조은정 (서양화87-91)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


석조 아치형 창문턱에 장미와 튤립, 아이리스, 패랭이꽃 등이 한 가득 담긴 유리병이 놓여 있는 이 정물화는 소위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기인 17세기를 대표하는 암브로시우스 보스하르트(Ambrosius Bosschaert the Elder, 1573-1621)의 작품이다. 당시 네덜란드 사회에서는 이슬람 세계와 신대륙, 동양에서 수입된 사치품들에 대한 애호 취향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희귀하고 값비싼 꽃들은 집중적인 수집의 대상이었다.

화면 전경에는 연분홍으로부터 주황색, 진분홍, 노란색과 푸른색 등 각양각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어우러져 있고 푸르스름한 안개 속의 풍경이 창문 너머에 펼쳐져 있는 모습은 화사하다. 이 그림이 각종 아트 상품에 즐겨 활용되고 인터넷에서 수많은 복제 이미지들이 떠돌아다닐 만큼 인기를 끄는 주 이유는 이처럼 ‘예쁜’ 첫인상이다. 그러나 좀 더 찬찬히 뜯어보면 예상치 못한 요소들이 불안하게 잠식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꽃다발은 화병과 창문 프레임이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과밀하고 육중하다. 가장 소담스러워야 할 장미들은 제 무게에 못 이겨 고개를 숙이고 있다. 꼿꼿하게 위로 솟은 화려한 노란색의 아이리스는 그림자 진 아치를 배경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만, 사실 화병과 창문틀 사이의 관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범이다. 

암브로시우스 보스하르트 ‘창턱에 놓인 꽃병’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뒤쪽에 꽂힌 아이리스가 이처럼 아치 앞쪽으로 삐져나오려면 화병이 앞으로 기울어져야 한다. 게다가 언뜻 보기에는 싱싱하고 잘 골라진 듯 보였던 꽃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 장미 잎사귀들은 이미 벌레 먹어서 구멍이 뻥뻥 뚫려 있고 튤립 줄기로 쐐기 벌레들이 기어 올라가는 중이다. 유리 화병 옆의 창문턱에는 줄무늬 카네이션과 인도양 갈고둥및 인도네시아 산 단뿔 산호고둥 껍데기가 놓여 있지만 이들 바로 가까이에는 살찐 파리가 기어 다니고 있다. 유리 화병 또한 스산한 느낌을 부채질한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표정의 얼굴들이 화병 표면에서 입을 벌린 채, 바닥에 놓인 화려한 꽃과 패각들을 바라보고 있다.

화가의 의도는 명확하다. 보스하르트는 현세적 아름다움과 쾌감이 한시적이고 덧없는 것임을 관객들에게 알려주려 했다. 그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네덜란드 사회에서는 소위 ‘튤립 파동(tulpenmanie)’이라고 불리던 광풍이 불었다. 거품 경제 속에서 중산층의 허영심과 투기 심리가 맞물리면서 국내에 새롭게 선보인 튤립 구근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치솟았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튤립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었다. 급속한 경제적 번영과 세속적 쾌락, 그리고 기존의 종교적 신념과 윤리적 지침 사이에서 사람들은 많은 갈등을 겪게 되었다. 보스하르트의 화려하고 예쁜 꽃 정물화는 바로 이러한 사회상을 반영한 결과물이자 도덕적 경고의 매개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