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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4호 2019년 5월] 문화 미술산책

미술산책 <16> 아테네 제1묘지와 잠든 소녀

야눌리스 할레파스의 조각


미술산책 <16> 야눌리스 할레파스의 조각

아테네 제1묘지와 잠든 소녀

글 조은정 (서양화87-91)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





묘지는 아름답다. 좀비와 흡혈귀, 살인마들의 주 활동무대로 영화에서 적극 활용된 덕분에 대개 음산하고 황폐한 풍경을 연상하지만, 사실 우리들은 살아있을 때 거주하는 공간만큼이나 죽은 후에 안식하는 공간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 왔다. 개인의 무덤이나 납골당, 유골함은 현세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떠난 이에 대한 추억을 되새기고 위로를 얻기 위한 기념물이고, 이들이 모여 있는 묘지는 그러한 기억들의 아카이브이다. 아름답거나 영광스럽거나 혹은 애틋한 기억들이 갖가지 조형물들로 시각화된 채 세월의 풍화를 맞아서 바래져가고, 그 옆에 다시 새로운 기억들이 조성되곤 한다. 아테네 제1묘지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 묘지는 아크로폴리스 남동쪽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19세기 초에 첫 번째 현대식 공동묘지로 조성되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도시 외곽 지역이었다. 당시 공중위생법에 따라서 도시 경계로부터 100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테네가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서 제1묘지는 주택가와 공장지역들로 둘러싸이게 되었다. 부활절을 비롯해서 각종 종교적 축일과 국경일에는 대규모 추도식이 거행될 뿐만 아니라, 평일에도 가족 단위 참배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등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아테네 시민들에게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공간이다.

아테네 제1묘지는 특히 인상적인 조각상과 기념비들로 인해서 조성 초기부터 ‘야외 조각미술관’으로 일컬어져 왔다. 그리스가 현대 국가로서 독립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회 지도층 인사들과 재정적 후원자들을 비롯해서 아테네의 유력 가문들이 서로 경쟁적으로 인상적인 조형물들을 자신들의 가족묘에 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재도 녹음이 우거진 사이로 애도하는 천사상과 신화적 알레고리 부조로 장식된 묘비, 고대 그리스 신전 양식을 본 딴 묘당 등이 곳곳에 산개해 있어서 인상적인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러한 조형물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소위 ‘잠든 소녀’라고 불리는 조각상이다. 석관 위의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의 모습을 묘사한 이 조형물은 야눌리스 할레파스의 작품이다. 당시 할레파스는 뮌헨 아카데미에서 갓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27세의 젊은 조각가였으나, 이미 서유럽 미술계의 신고전주의 양식을 완벽하게 익힌 상태에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개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 조각상은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아테네 시민들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오래된 무덤 조형물들 중에는 해당 가문이 몰락하면서 참배객의 발길이 끊기고 잡초로 뒤덮이는 경우도 흔하지만 이 소녀만큼은 오가는 참배객들뿐 아니라 멀리서 일부러 찾아오는 관람객들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다. 묘지를 방문할 때마다 누군가가 장미나 백합과 같은 꽃송이를 소녀의 품에 살포시 놓아둔 것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