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호 2019년 6월] 문화 미술산책
미술산책 <17> 표준과 잣대
마르셀 뒤샹 ‘3개의 표준 정지장치’
표준과 잣대
글 조은정 (서양화87-91)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
마르셀 뒤샹 ‘3개의 표준 정지장치’
현대 미술을 논할 때 피할 수 없는 인물이 바로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1887~1968)이다. 많은 이들이 소변기를 전시장에 끌어들이고 여장을 하는 등 기이하고 돌출적인 행동을 하는 작가로만 인식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의 작업들은 전통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미술과 사회에 대한 우리들의 보편적인 시각과 관습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치밀한 계산과 섬세한 연출의 산물이다.
뒤샹은 1913년에 ‘우연히 얻어진 형태들’을 포착하고 보존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이 실험은 1미터 길이의 실 세 줄을 1미터 높이에서 수직으로 떨어뜨렸을 때 이 실들이 중력의 작용에 따라서 다양하게 만들어내는 곡선들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캔버스 위에 이 실들을 떨어진 모양 그대로 고정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양을 본떠서 나무 자를 만들었다. 세 개의 자들은 똑같은 단위에서 비롯되었지만 모양도 제각각이고 직선길이 또한 전부 달랐다. 이처럼 우연에 의해서 1미터를 변형시키는 작업은 ‘표준 정지장치(Standard Stoppages)’라고 명명되었다.
우리는 미터라는 표준이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큰 권위를 지니고 있는지 간과하곤 한다. 그러나 사람의 키, 도로의 폭, 건물의 높이를 재고 각종 공산품과 농수산품을 사고 팔 때마다 이 표준 단위는 판단의 기준이 된다. 실제로 2미터인 줄 알고 구매한 커튼의 길이가 1미터 90센티미터라면 누구나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미터와 센티미터의 세상에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피트와 인치의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낯설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길이와 폭을 재는 잣대가 순간마다 바뀌어버린다면 더 이상 우리가 이해할 수도 안심할 수도 없는 이상야릇한 세계일 수밖에 없다. 마치 이상한 나라에 떨어져버린 앨리스처럼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나와 세상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게 될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서구 사회에서는 유독 공상과학 소설이 유행했다. 그 유명한 ‘타임머신’(1895)을 비롯해서 4차원의 세계와 시간 여행, 과학과 상상을 결합해서 역설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다양한 실험들이 문학과 예술 전반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기존의 형이상학(metaphysics)이 물리적 세계에 대한 초월적 영역을 다루었다면, 이제 그조차도 넘어선 환상과 부조리의 세계에 관심을 돌리게 된 것이다.
‘파타피직스(pataphysics)’라고 불리는 이 세계는 기존에 맹신되었던 과학적 객관성과 합리성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회의와 냉소적 시각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뒤샹의 ‘3개의 표준 정지장치’ 또한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성공한 일탈과 반항 대부분이 그렇듯 그의 도발이 한 세기가 지난 지금에는 전통과 권위의 상징이 되어서 또 다른 도전자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