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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호 2019년 11월] 문화 미술산책

미술산책 <22> 고대 그리스 묘비와 19세기 영국 여행자

알 크세노르의 부조


미술산책 <22> 알 크세노르의 부조
고대 그리스 묘비와 19세기 영국 여행자


글 조은정 (서양화87-91)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그리스는 서유럽 사회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답사 여행지였다. 기존의 그랜드 투어(Grand Tour)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그동안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서 잊힌 채로 남아있던 그리스는 모험심 많은 고대 애호가들에게 도전의 대상이 되었다. 아일랜드 화가인 에드워드 도드웰(Edward Dodwell, 1767-1832)의 ‘그리스 고대 유적 답사기’(1819)는 당시 서유럽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의 고대 그리스 애호 취향과 열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도드웰의 여행은 세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그리스의 섬들과 펠로폰네소스 반도, 중북부 지역까지 구석구석을 누비며 당시까지 고대 저자들의 문헌 기록을 통해서만 전해지던 유명한 유적지와 기념물들, 더 나아가서는 동시대 그리스 인들의 생활상과 풍습, 그리고 자연의 특색 있는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관찰하고 글과 그림으로 기록을 남겼다.

특히 1805년의 여행 중 보이오티아의 오르코메노스 지역에서 발견했던 부조에 대한 대목이 흥미를 끈다. 그의 일행은 한 마을의 교회 안마당에서 이 부조를 발견했는데, 회색 대리석 판에 거의 등신대에 가까운 크기의 남자가 조각되어 있었다. 다음은 그가 묘사한 내용이다.

“이 남자는 길게 늘어지는 옷을 걸치고 있었으며, 오른 팔과 두 발은 벗은 채였다. 왼팔에는 옹이진 지팡이를 괴고, 오른손으로는 발밑에 있는 개에게 메뚜기를 내밀고 있다. 그레이하운드처럼 생긴 개는 메뚜기를 잡으려고 난리법석을 떨고 있으며, 남자는 현대식 페즈(fez, 터키식 펠트 모자)같은 모자를 쓰고 있다. 이 기념비의 아랫부분은 땅에 묻혀있어서 내가 흙을 치워보았다. 몇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불완전해서 해석이 불가능했다.”

현재 아테네 국립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부조를 보면 도드웰의 묘사가 얼마나 정확하고 생생한지 알 수 있다. 그가 해석하지 못했던 명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낙소스 출신의 알크세노르가 나를 만들었다. 일단 봐!(ΑΛΞΗΝΩΡ Μ ΕΠΟΙΗΣΕΝ Ο ΝΑΞΙΟΣ ΑΛΛ ΕΣΙΔΕΣ[ΘΕ])”

이 부조는 묘비였지만, 누가 이 장례 조형물을 주문했는지, 주인공인 고인은 누구인지, 그의 업적이 무엇인지는 기록되지 않았다. 명문이 말해주는 것은 엉뚱하게도 묘비를 조각한 조각가에 대한 자랑이다. 여유로운 자세로 발랄한 개와 놀아주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과 더불어, 묘비가 천연덕스럽게 일인칭 시점으로 지나가는 이들에게 던지는 이야기는 죽음에 대한 거리감이나 경계심마저 허물어 준다. 200여 년 전에 이 묘비를 보면서 호기심을 표했던 영국 여행자가 이 글귀의 의미를 알았더라면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