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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8호 2019년 9월] 문화 미술산책

미술산책 <20> 샬롯의 귀부인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작
샬롯의 귀부인

글 조은정 (서양화87-91)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



미술 작품을 접할 때 우리가 꼼꼼하게 뜯어보지 않으면 놓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려주는 예가 19세기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 1849-1917)의 ‘샬롯의 귀부인(The Lady of Shalott)’이다. 폭이 2미터가 넘는 이 대작에서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처연한 표정으로 배 안에 앉아 있는 젊은 여인의 모습이다. 황량하고 어두스름한 물가 풍경과 대비되어 여인의 흰 옷차림이 환하게 드러난다. 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여인은 초점을 잃은 눈매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세부 사항들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의문점이 생겨난다. 비록 수수하게 차리긴 했지만 폭이 넓은 소매가 달린 우아한 드레스에 검은 허리띠를 두른 이 여인은 귀한 신분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여성이 뒤따르는 하녀나 시종도 없이 왜 이처럼 수풀이 우거진 물가에서 혼자 있는 것일까? 배를 정박시킨 쇠사슬을 풀어내어 길을 떠나려고 하고 있지만, 아담한 보트는 먼 여정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뱃머리에 동여맨 등불은 밤의 여정을 밝힐 만큼 환하지 않으며, 뱃전에 세워놓은 세 개의 촛불 가운데 두 개는 이미 불이 꺼져 있다.

촛불 앞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소상이 묵주에 감겨서 놓여 있고, 보트의 후미를 덮고 있는 깔개는 늘어져서 가장자리가 물에 잠겨 있다. 여인은 과연 목적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것인가? 아니, 목적지가 있기는 한 것일까?

워터하우스의 그림은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들에 대한 중세 전설을 차용한 낭만주의 시의 한 구절을 이미지로 재현한 것이다. “강의 어두운 흐름을 따라서, 마치 용감한 예언자가 비몽사몽간에 자신의 파국을 마주한 것처럼, 샬롯의 귀부인은 무표정하게 카멜롯을 바라보았다. 날이 저물자 그녀는 쇠사슬을 풀어내고 몸을 눕혔다. 너른 강물은 그녀를 싣고 멀리 멀리 흘러갔다.”

이 시의 주인공은 세상을 직접 마주 대하면 죽음을 맞게 된다는 저주에 걸려서 작은 섬 속의 탑에 은거해 있던 여인이었다. 거울을 통해 창밖 세상을 비춰보며 풍경을 수놓는 것이 일상이던 이 여인은 우연히 창밖을 지나던 유명한 기사 랜슬롯을 바라보고 사랑에 빠져서 결국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자유와 동시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 그녀는 보트를 타고 마지막 노래를 부르며 아서 왕의 궁정이 있는 카멜롯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까지 알고 나서 다시 워터하우스의 그림을 보면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또 다른 세부 요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트를 장식한 깔개 가장자리의 원형 패턴들에는 여러 풍경과 더불어 탑을 배경으로 한 여인과 붉은 망토를 걸친 기사가 수놓아져 있다. 주인공은 자신이 평생 동안 거울을 통해서 엿보았던 창밖 세상의 모습이자 운명적인 짝사랑과의 만남을 구현한 작품과 함께 마지막 여정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