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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호 2019년 2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베네수엘라행 민족주의 열차

전영기 중앙일보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베네수엘라행 민족주의 열차

전영기
정치80-84
중앙일보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조짐이야 진작부터 있었지만 나쁜 정치가 나라를 말아먹는 데 20년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베네수엘라처럼 잘 보여주는 곳도 없다. 한두 해 사이에 인구의 10%인 300만명이 국경을 빠져나갔다. 국민의 평균 몸무게가 1년 만에 11kg 줄어(2017년, 약 6,000명 상대 조사 결과) 길거리에서 개를 찾아 보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한때 넘쳐나는 돈을 주체하지 못했던 석유 부국, 남미의 베네치아였던 그 아름답던 나라는 어디로 갔나.

베네수엘라는 일국의 참극에서 멈추지 않고 세계의 화약고가 되었다. 두 명의 대통령이 국제사회의 인정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외신들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베네수엘라 사태를 타전한다. 논조는 비슷하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차베스의 사회주의적 통치를 물려받은 마두로 대통령은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사설을 썼다. 유수의 미디어들은 진영을 가릴 것 없이 “마두로는 석유 대국을 완전히 파탄냈다. 기초 식량과 의료 공급이 중단됐다. 화폐는 무의미하다”는 비참한 사실을 전하고 있다. 1년 전 “물가상승률 2600%를 따라잡기 위해 베네수엘라 정부가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40% 인상”했던 때는 먼 옛날이다. 

베네수엘라 국민이 맞이한 비극은 주지하다시피 1999년 이래 차베스-마두로 집권세력이 노동자·농민·학생·원주민 계층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고 선동해 나라를 온통 적대적인 반미·자주·민족주의의 조국으로 변질시키는 과정과 궤를 같이 한다. 오랜 식민지 시절 형성된 집단적 피해의식을 환상적 민족주의로 보상해 정권을 20년간 잡았는데 그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게 문제였다. 2013년 마두로가 권력을 이어받을 즈음 찾아온 저유가 시대의 국가 재정으론 환상적 민족주의를 더 이상 가동할 수 없게 됐다. 차베스-마두로의 민족주의는 집권 도구로는 탁월했을지 모르나 시장과 현실,민생과 국민통합 실력은 형편없는 지속불가능한 종족주의였다. 종족주의의 수명은 좌파, 집단주의, 인민주의, 국제친선, 반미영웅 따위들과 어울려 조금 연장될 수는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한국의 민족주의는 건강한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다. 좋은 방향도 있고 걱정되는 흐름도 있다. 민족주의는 냉철하게 관리되어야 한다. 민족은 국민과 헌법, 글로벌리즘 등 국가의 생존 및 번영을 위한 다른 가치들과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인이 베네수엘라행 민족주의 열차에 올라타는 일은 없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