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485호 2018년 8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한국에 국제 학술교류센터 짓자

정상욱 미국 럿거스대 물리학과 석좌교수


한국에 국제 학술교류센터 짓자





정상욱
수학75-82
미국 럿거스대 물리학과 석좌교수


최근 미중 간의 무역전쟁으로 인한 긴장 관계가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과거 소련이나 독일이나 일본 등의 추격으로부터 단 한 번도 패권국의 지위를 놓지 않았던 미국도 이번에는 긴장하는 모양새다. 많은 인구수와 풍부한 자원, 철저한 중앙통제를 기반으로 한 중국의 위협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미국이 과학과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고부가가치 산업의 우위로 유리함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미 과학과 첨단 기술 분야에서도 중국의 추격이 시작되고 있음을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2008년부터 중국이 시도하고 있는 천인계획(千人計劃)을 필두로 하는 이공계 지원 계획이다. 이미 중국에서도 규모만 커지는 경제의 한계를 깨닫고 있으며, GDP 대비 연구·개발 규모를 연평균 10% 이상씩 늘리면서 유럽을 제치고 미국을 추격하고 있다.


이렇게 급격하게 늘고 있는 중국 이공계 투자의 핵심은 바로 인재다. 자국 출신 해외 인재뿐 아니라 우수한 외국의 젊은 학자들 또한 대거 불러 모으고 있다. 과거 미국이 전 세계의 인재를 끌어모아 자국의 첨단 기술 자양분으로 삼으며 일으킨 현상을 두뇌유출(brain drain)이라고 불렀는데, 이제는 같은 현상이 중국을 향해서 일어날 조짐을 보인다. 더욱이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줄어든 과학 기술 자금과 까다로워진 이민 절차 등과 맞물려 미국 내에서도 두뇌유출의 우려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최근 워싱턴포스트에는 두뇌유출에 관한 기사를 통해 예일대에서 박사를 마치고 중국 칭화대에 새 연구소를 꾸린 스페인 출신의 유전학자가 소개됐는데, 필자도 최근에 만났던 상해뉴욕대학의 문필경 박사와 천인계획의 일환으로 상해고압과학연구소에서 일하는 김덕용 박사 등 미국이나 유럽에서 중국으로 이동한 젊은 한인 학자들을 보며 과학계에서도 흐름이 바뀌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과학계에 다가올 변화를 예측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두뇌유출의 양상은 주로 미국이나 유럽 등지로 나가서 수학했던 인재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 현상을 지칭했다. 2013년 미국과학재단 조사에 따르면 미국 내 한인 박사학위 취득자 중 60% 정도가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고 조사됐다고 한다. 스위스 경영개발 연구원이 발표한 두뇌유출 지수에서도 우리나라는 10점 만점에 3.98점으로 하위권에 머무는 수준이다. 각자 개인의 상황에 따라 미국과 한국을 비교하는 문제에서 미국의 연구환경과 경제 규모에서 오는 이점이 타지 생활에서 오는 어려움보다 더 크기 때문일 것인데, 앞으로는 이러한 비교를 중국과 한국 사이에서 한다는 것이 새로운 상황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차이가 한 가지 있다. 바로 중국은 한국의 옆에 있는 나라라는 점이다. 긴 비행시간과 시차 및 문화적인 차이점까지 극복해야 하는 서양국가로의 인재유출에서도 한국은 고전해 왔는데 앞으로 쉽게 오갈 수 있고 같은 동아시아 국가인 중국과는 매우 불리한 싸움이 될 수 있다. 이미 우리나라는 반도체 산업의 인재들이나 항공기 조종사 등의 이직 현상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겪고 있는데 여기에도 인접 국가라는 점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중국으로의 과학계 두뇌유출이 앞으로 더욱 큰 위기로 다가올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다가오는 변화를 위기로 만드느냐 기회로 만드느냐 하는 것은 변화에 대응하는 적절한 대처에 달려있다. 우리가 시대의 흐름을 읽어 냈다면 앞으로의 적절한 대처는 무엇일까. 인재 블랙홀이 될 중국으로 수많은 유수의 학자들이 몰려드는 상황에서 우리의 소중한 인재를 지켜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더 나아가 중국으로 모여든 인재들의 활용방법을 찾아낼 때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잠재적 인재 블랙홀인 중국 과학계와 여전히 우리보다 몇 발자국 앞서 있는 일본 사이에 끼인 한국의 새로운 역할이란 무엇인가. 바로 숙명과도 같은 지정학적인 위치를 고려하면 과학계 허브의 역할이 새롭게 나타나는 기회일 수 있다. 마치 얼마 전 북미 정상회담에서 싱가포르가 중계자로서 역사적인 회담의 장소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수많은 언론인의 방문으로 인한 특수와 간접적인 홍보 효과를 누렸던 것과 같은 것이다. 한국의 위치가 학술대회를 유치하기에 점점 유리한 조건이 될 것을 예상하고 그것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


이미 오랜 과학의 역사를 가진 유럽이나 미국은 수려한 자연경관이 있는 곳에 학술교류센터들을 갖추어 학자들을 모으고 있다. 독일 알프스의 성을 개조한 ‘성 링베르크’라든가, 이탈리아의 자국 물리학자 이름을 딴 ‘에토레 마요라나 센터’, 5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미국의 ‘아스펜 센터’ 등은 이미 학자들의 네트워크에 있어서 중요한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학술교류센터의 중요성은 단순한 방문자의 증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파생되는 학계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뿌려지는 과학 발전의 자양분에 있다. 그동안 일본이나 한국의 과학계는 그 규모의 한계로 인해 국제적인 학술대회 대부분을 유럽이나 미국을 중심으로 참가해 왔고, 물리적인 거리는 우리 학계의 적절한 네트워킹과 주류로의 진입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 돼왔다.


그런데 앞으로는 한·중·일 만으로도 규모를 갖춘 국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더 나아가 전 세계 학자들을 모을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허브로서 나름의 역사를 쌓아 나아가려면 수려한 경관만이 아니라 장소 자체의 의미와 이야기를 가진 곳이라야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게 할 것인데 창의적인 시선으로 한반도를 재발견해야 하는 시점이다. 접근성과 수려한 자연이 있는 제주도나 평화적인 올림픽 개최로 각인된 평창이나 심지어는 포 발사장이 해안 관광지로 변하고 있는 북한의 원산갈마 해안 같은 곳에 국제 학술교류센터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싱가포르나 스위스가 경제와 정치의 중계자 역할을 하듯이 한국이 학술교류센터를 통하여 가장 적은 투자로 동방의 과학 허브가 되는 것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