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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호 2018년 6월] 문화 미술산책

미술산책<5> 웨지우드의 ‘에트루리아’ 도기

고전미술사 박사 조은정 동문이 그리스에서 들려주는 미술이야기


미술산책<5> 웨지우드의 ‘에트루리아’ 도기






글 조은정(서양화87-91)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

서양미술사에 어느 정도 관심 있는 사람들은 위 도판을 보는 즉시 그리스 도기임을 짐작할 것이다. ‘서양미술의 이해’와 같은 과목을 수강한 모범생들이라면 “오, 적회식 도기군!” 하고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인물의 형태선 바깥쪽 배경을 검게 칠한 후에 얇은 붓질로 눈·코·입과 머리카락, 옷 주름 등을 묘사하는 소위 적회식(赤繪式, red-figure technique) 도기는 고대 아테네 사회의 주요 수출 품목이었다.

그러나 이 도기는 사실 영국을 대표하는 도기 회사의 창립자 웨지우드(Josiah Wedgwood, 1730-1795)가 1780년경 자신의 공방 ‘에트루리아(Etruria)’에서 제작한 것이다. 그리스 사회에서 물 항아리로 사용하던 히드리아의 형태를 모방하고, 그 위에 홀을 들고 관을 쓴 채 앉아있는 여성 주변으로 에로스와 화장용품을 들고 있는 여성들, 월계관을 쓴 젊은 남성을 그린 이 도기는 당시 나폴리 궁정의 영국 외교관 해밀턴(William Hamilton, 1730-1803)이 현지에서 수집한 고대 도기를 본뜬 것이다.

고전 모티프를 디자인에 활용하고, 새로운 제작 기술로 적회식 도기의 검정색과 적갈색을 재현해낸 웨지우드의 장식 도기들은 영국 상류층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공방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사람들 대부분은 이 도기들이 고대 이탈리아 에트루리아 문명의 산물이라고 여겼다. 도기의 그리스어 문구나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도상들에 대해서는 그리스에서 ‘이주해 온’ 화가들이 에트루리아에 터전을 잡고 제작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시도되었다. 

당시까지 그리스 본토에서 이 같은 도기들이 발견된 사례가 거의 알려진 바 없었다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약 반세기 후 이탈리아의 소도시에서 적회식 도기들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을 때 이들이 ‘에트루리아 산’인지 아니면 ‘그리스 산’인지에 대한 논쟁은 고고학자들뿐 아니라 골동품 수집가들에게도 뜨거운 이슈였다. 만약 그리스가 원 출처라면 이탈리아 도기들의 ‘원본성’과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재는 아테네 산 도기가 이탈리아에 수출되고 나중에 현지 생산자들에 의해서 대체되어 시장에서 도태된 과정이 구체적으로 밝혀졌지만,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그리스 미술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이 미지로 남아있었다. 이 논쟁에 뛰어들었던 한 젊은 독일 학자는 1840년 자신이 연구했던 그리스를 실제로 만나보기 위해서 현지답사에 나섰다가 델포이에서 일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고대 로마인들이 수입한 그리스 명품 도기를 ‘현대적으로’ 재현했던 웨지우드의 도기는 그 자신이 또 다른 유물이 되어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서양 근세 역사에서는 이처럼 곳곳에서 고전주의의 열광적인 흔적들을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