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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0호 2019년 1월] 문화 미술산책

미술산책<12> 화가와 모델

안젤리카 카우프만, ‘트로이의 헬렌을 그리기 위해서 모델을 고르는 제욱시스’


화가와 모델




글 조은정 (서양화87-91)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Zeuxis, 기원 전 5세기 경 활동)가 크로토나 시를 위해서 트로이 신화의 주인공 헬렌을 그리게 되었을 때, 한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의 모델을 선택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고대부터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에 이르기까지 학자들과 예술가들이 이 일화를 지속적으로 언급한 이유는 제욱시스의 행동이 이상적 아름다움에 대한 올바른 추구 방식을 보여준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로마 수사학자 키케로(Cicero, 기원 전106-43)는 모든 장점들을 한 사람에게서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제욱시스의 생각이 자연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고 보았다. 자연은 한 대상에서 모든 부분들을 완전하게 마무리하는 경우가 없고 누군가에게 우월한 요소를 준다면 언제나 이를 상쇄할 만한 흠을 덧붙이기 때문에, 창작자는 모든 사례들을 신중히 검토해서 조화와 균형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제욱시스와 다섯 모델들의 이야기는 여러 화가들이 작품의 소재로 삼았는데, 그 중에서도 안젤리카 카우프만(Angelica Kauffman, 1741-1807)의 경우는 특별하다. 앤마리 브라운 기념 도서관은 2016년에 파리 퐁피두센터에 이 작품을 대여한다는 기사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작품은 우리 소장품들 중에서도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18세기에 여성 화가가 제작한 것이고, 또 다른 이유는 그 자체로서 훌륭한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품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 ‘여성’ 화가라는 점이 먼저 부각될 정도로 당시 여성은 주류 미술계에서 소수자였다.

대부분의 ‘남성’ 화가들이 그린 작품들에서 크로토나 시의 다섯 소녀들은 제욱시스와 관람자의 이중적인 시선에 노출된, 수줍지만 관능적인 감상 대상으로 묘사되었다. 카우프만의 그림에서도 화면 왼쪽의 네 여성들은 마찬가지로 수동적 존재들이지만 오른쪽의 한 여성만큼은 예외이다. 모델들의 몸을 조사하느라 정신이 팔린 중앙의 화가 뒤에서 이 여성은 붓을 들어서 캔버스로 향하고 있다. 즉 그려지는 객체가 그리는 주체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화면 속 캔버스의 모퉁이에 “안젤리카 카우프만이 그렸다(Angelica Kauffman pinx)”라는 문구가 적혀 있어서 화가가 해당 모델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카우프만은 오랜 세월 동안 유럽 아카데미즘의 교본처럼 회자되어 온 신화적 이야기의 내용을 비틀었던 것이다. 1768년 런던 왕립 아카데미의 창립 회원일 정도로 널리 인정받는 화가였지만, ‘여성’으로서 활동하는 것이 당시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녹록지 않았음을 짐작하게 해 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