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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1호 2019년 2월] 문화 미술산책

미술산책 <13> 솔 르윗의 드로잉 벽화

조은정(서양화87-91)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

미술산책<13> 르윗의 드로잉 벽화


글 조은정(서양화87-91)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


미술의 전통적인 개념에 도전했던 수많은 현대 미술가들 가운데서도 솔 르윗(Sol LeWitt, 1928-2007)은 독자적인 위치에 서 있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는 드로잉 벽화 연작이다. 현재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르윗의 드로잉 벽화에 대한 미술관 홈페이지의 소개는 다음과 같다: “솔 르윗 작, <수직으로 균등하게 15개 구획으로 나뉜 벽, 각 구획별로 다른 방향과 색깔, 그리고 모든 조합이 적용됨(A Wall Divided Vertically into Fifteen Equal Parts, Each with a Different Line Direction & Colour, and All Combinations)>, 1970년, 벽면에 흑연(Graphite). 가변 규격. 1973년 구입. 소장 번호 T01766.” 이러한 정보들은 사실 많은 오해와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르윗의 드로잉 벽화들 대부분은 작가의 지시문에 의거해서 다른 사람들이 실행하는 작업의 결과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위의 작품에서 르윗은 15개의 구획에 어떻게 선들을 그어야 하는지 간략한 도면을 제시했다. 검정색 선은 수직으로, 노란색 선은 수평으로, 붉은 색 선은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대각선 방향으로, 푸른색 선은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내려가는 대각선 방향으로 그어져야 한다.

이러한 각 색의 선들이 단일하게 적용되는 구획 4개로부터 두 가지 조합으로 적용되는 구획 6개, 세 가지 조합으로 적용되는 구획 4개, 그리고 네 가지 모두가 조합되는 구획 1개에 이르기까지 총 15개의 구획들은 이 특정 색깔과 방향의 선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모든 조합의 가능성을 포괄한다.

반면에 르윗은 벽면의 면적이나 비례, 선의 굵기, 간격, 재료와 속도 등에 대해서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가 온전하게 미래 수행자들의 몫으로 남겨놓은 이러한 항목들이야말로 우리가 작가의 ‘필력’이나 ‘개성’, ‘양식’, ‘표현력’이라고 부르는 특징들을 만들어내는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을 생각하면, 르윗의 지시문과 도면에 따라서 충실하게 벽면에 선을 긋는 미지의 누군가야말로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테이트 미술관이 1973년에 구입한 작품은 1970년 르윗의 지시문과 도면에 따라서 세 사람의 조수들(알 윌리엄스, 크리스 핸슨, 니나 카옘)이 뉴욕의 한 미술관 벽면에 직접 드로잉 작업을 했던 설치 작업이다. 르윗은 이러한 설치 작업들을 판매하는 경우에 등록 번호와 함께 증명서를 발급했는데, 실제로 그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서명이 첨부되는 물리적인 결과물은 바로 이러한 증명서와 도면들이다. 그렇다면 보스턴 미술관이 ‘솔 르윗 작(作)’이라고 명제를 붙인 대상은 1970년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제작된 벽화일까, 아니면 르윗이 1973년 7월 6일 런던에서 발급한 증명서일까? 많은 이들은 작품을 실제로 제작하는 사람이 누구이건 간에 이 드로잉 벽화의 형태와 수행 방식에 대한 개념을 제시한 르윗이 창작의 주체이자 작가라고 주장한다. 테이트 미술관이 구입한 T01766 역시 1973년 발급된 증명서가 아니라, 이 서류가 첨부된 벽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르윗은 작품의 제작년도를 자신이 개념을 설계한 시점이 아니라 해당 지시문이 처음으로 물리적으로 ‘실행된’ 시점으로 잡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르윗의 도면과 지시문에 따라서 다양한 버전의 실제 작업들이 그의 감독 하에 종이와 건물 벽, 실크스크린 프린트, 인쇄물 등으로 제작되었으며, 이슈화된 증명서와 함께 전시되었다. 현재 미술관과 문화기관, 개인 소장가들이 보유하고 있는 솔 르윗의 작품들은 모두 이러한 작업들이다.

그러나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솔 르윗의 지시문에 따라서 직접 작업을 수행해 본 이들이 올린 결과물과 감상들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르윗이 지시한 내용들은 수학의 기본 공리와 같이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하면서도 증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단순한 반면에,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창출되는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표현력은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점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이 칼럼을 쓰면서 도판을 제시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르윗의 1970년 드로잉 벽화와 1973년 증명서를 구입한 테이트 박물관은 해당 사물들에 대한 저작권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에 자랑스럽게 자신들의 작업을 올린 수많은 개인들과 단체들의 이미지 저작권들이 누구에게 있는지, 혹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지는 확인할 도리가 없다.

사실은 솔 르윗의 <수직으로 균등하게 15개 구획으로 나뉜 벽, 각 구획별로 다른 방향과 색깔, 그리고 모든 조합이 적용됨>이 정확하게 어느 사물을 가리키는 것인지,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이미지 도판이 무엇인지 필자가 잘 모르고 있다는 점도 한몫한다. 지적 재산권과 저작권 문제가 첨예한 이슈가 되고 있는 이미지 복제의 시대에 솔 르윗의 시도가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지 다시 한 번 알려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