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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호 2018년 5월] 문화 미술산책

미술산책 <4>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고전미술사 박사 조은정 동문이 그리스에서 들려주는 미술이야기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John Singer Sargent, Carnation, Lily, Lily, Rose, 1885-86, oil on canvas, 153.7 ×174cm. 

소장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꽃이 만발한 여름 정원에서 두 아이들이 종이 등에 불을 밝히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이 그림은 존 싱어 서전트(John Singer Sargent, 1856-1925)가 런던 미술계에 성공적으로 입성하게 한 발판이었다. 간혹 미술개론서나 관광책자에서 ‘카네이션, 백합, 장미’로 제목을 바꾸어버린 경우가 있다. 어떤 영국 작가가 쓴 동화에서도 런던으로 데이트를 간 시골 중년 부부가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보고 “왜 백합이 두 번 들어갔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장면이 나올 정도니, 자국인들도 어색한 느낌이 드는 모양이다.

사실 이 제목은 당시 작가와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던 대중가요의 가사에서 따 온 것이다. “거기 목동들, 나의 플로라가 여길 지나갔는지 말해주겠나? 전원을 거느리는 미의 여왕을. 그녀는 머리에 화환을 둘렀네.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그녀의 손에는 지팡이가, 숨결에서는 부드러운 향기가.” 그림 속 7살과 11살짜리 금발머리 소녀들은 노래 속의 플로라가 아니다. 어스름하게 담홍색으로 물든 정원의 꽃들이나 중국식 종이등불과 마찬가지로 플로라가 지배하는 들판에 만개했다가 찰나에 사라질 아름다운 존재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작품은 서전트가 온전히 야외 작업으로 진행한 소수의 사례 중 하나이다. 흔히 인상주의나 외광파 화가들이 들판에서 일필휘지로 붓을 휘둘렀을 것으로 상상하지만, 제작 과정을 보면 빛의 효과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일이 녹록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1885년 9월부터 11월 초까지, 그리고 이듬해인 1886년 여름부터 10월까지 작업에 매달렸는데, 황혼 무렵이 짧기 때문에 진척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첫 모델에게는 가발을 씌웠다가 나중에 실제 금발머리 소녀들로 교체한 것과, 이들에게 흰 드레스를 입힌 것 등은 저녁노을이 물들이는 효과를 배가시키려는 계산이었다.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서 아이들이 노는 동안 다양한 포즈를 스케치하고, 캔버스의 비례를 여러 차례 바꾸면서 화면 구성을 실험했다. 현재까지 적어도 5점 이상의 유화 습작들이 확인되었다.

서전트가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에 기울였던 노력은 동시대 작가들 사이에서 결코 유난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변덕스러운 천재 예술가들에 대한 신화와 전설들로 인해서 대다수 예술가들이 치밀한 설계자이자 숙련된 연출가라는 사실을 간과하곤 한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필자는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본 기억이 없다. 정신없이 전시실에서 전시실로 옮겨 다니다가 나중에는 작품들이 뿜어내는 기에 눌려서 기진맥진했던 느낌만 남아 있다. 만약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모든’ 작품들을 섭렵하려고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이 작품을 포함해서 단지 몇 점만이라도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만나보고 싶다.

글 조은정(서양화87-91) 목포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