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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호 2018년 2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앞치마 두른 전직 CEO “명절엔 며느리와 전 부쳐요”

이대식 전 보그워너 대표


앞치마 두른 전직 CEO “명절엔 며느리와 전 부쳐요”
이대식 전 보그워너 대표

<압구정노인복지센터 제공>



부엌에 들어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자랐다. 일에 치이면서 손에 물 한 방울 묻힐 겨를 없었다. 50년 넘게 차려진 밥상을 받고만 살아왔는데, 이제와 집에서 세 끼 꼬박꼬박 챙겨먹는 남편을 빗댄 ‘삼식이’ 소리에 뒤통수가 근질거린다. ‘먹고 사는 일’이 고민인 요즘 은퇴 남성들의 모습이다.

위기감을 느낀 중년 남성들이 요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남성 요리강좌가 인기를 끌고, 60대 이상 은퇴 남성만 출전하는 요리대회도 생겼다. 마포구가 6년째 개최 중인 ‘삼식이 요리경연대회’가 그곳. 최근 이 대회에서 당당히 대상을 거머쥔 동문이 있으니, 이대식(상학67-71) 동문이다.

이 동문은 5년 전 미국 자동차 부품회사 보그워너 CEO를 지내고 은퇴했다. 앞치마는 3년 전에 처음 둘러봤다. 대회에서 선보인 메뉴는 부추해물전과 알밥. 오색 재료를 소담하게 둘러 담은 뚝배기와 손바닥만 하게 부쳐낸 전에 화룡점정으로 홍고추를 얹어낸 만듦새는 이미 초보의 솜씨가 아니다. 지난 1월 25일 이 동문이 3년간 요리수업을 받아온 압구정 노인복지센터에서 그를 만났다. 지금껏 여러 인터뷰를 고사해오다 동창신문이라 응했다는 그의 휴대폰에 지난해 입학 10주기 기념으로 본회에서 선물한 서울대 로고가 붙어 있었다.

은퇴 후 남성 요리교실 수강
‘삼식이 요리경연대회’ 대상

“아내가 저더러 ‘은퇴하고 배운 것 중에 요리가 제일 잘한 일’이래요. 은퇴하고 한동안은 사진도 찍으러 다니고, 서예를 배워서 전시에도 냈죠. 어느 날 동네 복지관에서 여는 남성 요리교실에 사람이 모자란다고 해서 서울고 동기 친구들과 다같이 들으러 온 게 시작이었어요. 거부감은 없었습니다. 이미 방송엔 남성 셰프들이 나오고, 요리하는 남자가 대세가 된 때였으니까요.”

가장 먼저 밥 짓기부터 배웠다. 창원에 있는 회사에 다니느라 15년간 주말부부로 지냈지만 외식이 잦아서 할 줄 아는 요리랄 게 없었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등 기본 메뉴를 하나하나 정복해 갔다. “3대가 덕을 쌓아야 주말부부가 된다는데, 요리까지 알아서 하니 아내는 4대 정도 덕을 쌓지 않았을까” 너스레를 떠는 그다.

“요리의 매력은 ‘나눔’인 것 같아요. 정성을 들여서 만든 음식은 내가 먹어도 맛있고 다른 사람이 먹어도 맛있죠. 내가 만든 것으로 누군가를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건 참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재밌어서 즐겼고, 즐기니 잘 하게 된 것 같아요.”

그가 수강한 복지관 요리강좌의 제목은 ‘행복을 요리하는 남자’. 그날 만든 음식은 ‘나눔 도시락’으로 지역 내 저소득층 어르신에게 전달됐다. 대상을 탔을 때도 “도시락을 배달하면서 인연을 맺은 어르신께 얼른 알려드리고 싶다”던 그다. 어떤 요리가 제일 자신 있고 주변 반응이 좋은지 물었다.

“부추전, 녹두전 같은 전 만드는 게 자신 있더라구요. 어제도 굴을 사다가 굴전을 해먹었죠. 아내는 고추장하고 굴소스 넣어서 만든 김치볶음밥이 제일 맛있다고 해요. 명절에는 아내더러 손주 보라고 하고 며느리랑 둘이서 전 부치고 동그랑땡도 빚습니다. 요리하는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겐 제법 자랑거리인가봐요.”



삼식이요리대회에 참가한 이대식 동문의 모습 <압구정노인복지센터 제공>


대회에서 이 동문은 직접 만든 알밥과 해물전을 선보였다.<압구정노인복지센터 제공>



인터뷰 전 이 동문은 자신의 인생이 요약된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건넸다. ‘CEO의 자격’을 써놓은 장에서 ‘Quick hands’와 ‘Strong legs’가 눈에 띄었다. ‘부지런한 실천’으로 압축되는, 은퇴 후에도 그의 삶을 움직이는 모토다.

“집에서 가까운 도산공원을 운동 삼아 다니는데 일요일 아침엔 굉장히 지저분해요. 토요일 저녁에 젊은이들이 놀다 가면서 생긴 쓰레기들이죠. 집게 들고 30분 정도 주우면 깨끗해져요. 골프를 좋아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치는데, 아무리 오래 쳐도 나에게 수고한다는 사람 하나 없어요. 매주 일요일마다 공원 청소를 하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고맙다’고 하더군요. 요리처럼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일인 거죠.”

이 동문의 올해 목표는 양식당에서 맛본 요리들을 직접 만들어 보는 것. 봄이 되면 주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이탈리아 요리 강좌를 들을 기대에 가득차 있다. “이왕이면 아내가 못 하는 요리를 배워보고 싶다”며 웃었다. 요리하는 사람답게 요새는 부쩍 그릇 욕심이 난다고. 요리 외에는 인문학 공부에 열을 올려볼 참이다.

“은퇴란 참 좋은 거예요.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이니까요. 각자 두 손에 가지고 태어난 탤런트가 있는데 살다 보면 그걸 잊어요. 특히 서울대 나온 사람들은 공부하고 일만 하느라 다른 재능을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죠. 은퇴 후에 하고 싶은 것들을 과감하게 시작해보세요. 잘 맞는 게 있을 겁니다. 어쩌면 저처럼 생각지 못했던 분야에서 재미를 발견하지 않을까요.”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