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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호 2016년 12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탄핵 이후가 문제다

송호근(사회75-79) 모교 사회학과 교수


탄핵 이후가 문제다

송호근(사회75-79) 모교 사회학과 교수



참 어지간히 기다렸다. 11월 내내 시민들은 광장으로 나갔다. 분노해서 나갔고, 당황해서 나갔고, 참담해서 나갔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끼리 촛불을 들고 구호를 외쳐도 속이 풀리지 않은 암울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촛불의 물결은 장관이었다. 무너진 심정을 부여잡은 사람들이기에 더 감동적이었다. 생면부지 사람들 간에 잊었던 동지애가 흘렀다. 그 공감의 전파는 함성을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 촛불집회에 모인 사람들은 비로소 시민이 되었다. 위급한 현실을 공감하고 해결을 위한 합주행동에 나서는 것이 시민됨의 최소한의 요건이다. 외신들은 경외감을 실어 뉴스를 타전했다. 4차 촛불집회, 100만 인파가 한 자리에 모이는 광경을 처음 접했을 것이다. 이웃 일본이나 중국, 심지어는 미국조차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저 100만 시위대의 일사불란한 집회(集會)와 산회(散會)는 한국에서만 가능한 현상이다. 100만 인파가 발성한 하나의 목소리에서 한국인의 강한 민주적 심성을 발견했다.


전국 200만명이 모인 5차 촛불 집회, 트랙터를 몰고 상경한 ‘전봉준 투쟁단’은 양재 IC에서 멈췄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광화문, 시민항쟁단은 청운동에서 막혔다. 청와대가 코앞이었다. 관군과 항쟁군은 국가기강을 문란케 한 통치자와 횡포 무리를 척결하라는 광장의 외침에는 한편이었지만 직역이 달랐을 뿐이다. 122년 전 가을, 한양으로 진격하던 동학군은 안성 부근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기관총 세례를 받아 퇴각했다. 보국안민 깃발을 들고 승평일월과 군주의 덕화를 빌던 백성이었다. 군주가 급기야 효유문을 발했다. ‘경동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 적자(赤子)로서 분수를 지키라’. 지난 토요일 밤 항쟁단은 집으로 돌아왔지만, 청와대의 묵묵부답은 마음이 찢긴 채 내놓은 고종의 비답(批答)보다 못했다. 122년 후, 대통령은 청와대에 있었다. 청와대 사람들은 ‘민심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메시지만을 몇 차례 발령했다. 누구의 뜻인지는 불분명했다. 5차 촛불집회에도 박근혜대통령은 관저 깊숙이 박혀 있었다. 눈발이 조금 날리고 촛불이 점멸하고 함성이 일었을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저 어디가 끝인가? 


11월 29일, 국회의 탄핵발의 3일 전, 대통령이 국민 앞에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것을 단념했다는 듯 편안한 표정이었다. ‘모든 권한을 내려놓고 자신의 임기단축과 퇴진에 관한 법절차와 일정은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했다. 자신의 운명을 국회로 돌렸으니 일단 촛불 민심이 일궈낸 시민정치의 성과라는 점에서 한국정치에 기록될 역사적 순간이었다. 국민주권 원리와 헌법정신을 어긴 대통령의 권한을 회수해야 한다는 시민의 각오와 각성이 결실을 맺은 듯 했다. 그런데 성취감도 잠시, 말의 행간에 숨은 뜻이 아리송해지자 근심이 몰려들었다. ‘임기단축과 퇴진을 법절차에 따라 하겠다’는 것은 무슨 뜻? 그 배경에 ‘개헌’이라는 그림자가 어른거렸던 거다. 더욱이, 탄핵 절차를 밟지 않고 대통령 권한을 자의로 중단하는 것과, 권한을 국회로 이전하는 것이 과연 적법성이 있는지, 협치에 취약한 국회가 이해 득실을 따지지 않고 퇴진과 대선일정을 대국적 관점에서 합의할 수 있는지, 그리고 대통령 궐위 기간을 관리할 거국중립내각을 과연 가동할 수 있는지 등등의 문제 말이다. 당장, 며칠 후로 예정된 탄핵발의가 가능할까? 여기에는 복잡한 셈법을 동원해야 한다. 혹여, 사퇴의사를 어쨌든 비친  대통령을 다시 탄핵이라는 냉혹한 단두대에 세울 때 거센 역풍이 불 수 있기 때문이다. 탄핵이 실패하면 대통령은 돌려준 권력을 거둔다. 그리고 사분오열된 국회를 호령한다. 그것은 시민정치의 좌절을 의미한다. 광장에서 한 몸이 된 촛불 시민들도 이젠 여러 갈래 대오로 흩어져 거리투쟁에 나설 것이다. 대통령 국민담화가 있은 지 불과 서너 시간 뒤, 국회에서는 벌써 파열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묘수인가?


다행히 담화가 있던 날 저녁에야 어수선한 정국이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다. 비박계는 1주일가량 지켜본 후 대통령의 자진 사퇴의사가 분명치 않다면 탄핵을 강행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이럴 때일수록 정도(正道)를 구축해야 한다. 분파투쟁에 매몰돼 판이 깨지는 사태를 대비해 항상 근본으로 돌아갈 좌표가 필요한 법이다. 시민 생업의 정상화와 심리적 안정을 꾀하고, 각 정당에 대선준비를 위한 시간적 여유를 갖게 하려면, 우선 퇴진일정을 분명히 결정하는 것이 최선이다. 즉 대통령이 스스로 자진 사퇴 일정을 밝혀야 한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정국은 회오리에 휩싸이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거국중립내각조차 상상하기 어렵다. ‘국가와 국민’을 항상 외쳐왔던 대통령은 최후의 순간에도 ‘국정안정’과 ‘국민 민생’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지난 11월 15일자 중앙일보에서 제안한 내용을 다시 한 번 상기하고자 한다.  2017년 4월 25일을 대통령 퇴진일로 결정하자. 그리고 헌법 규정상 하야 60일째인 6월 24일 대선을 치른다면, 각 정당들은 지금부터 약 7개월 정도의 준비기간을 확보할 수 있다. 개헌은 차기 정권의 과제로 이월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현재의 정당구도로는 퇴진 관리, 대선, 개헌을 동시에 수행할 능력이 부족하다. 무너진 정당경쟁 구도를 복원하는 일조차 현재로서는 만만치 않다. 한 축이 무너진 채로는 버거운 정치일정을 소화할 수 없고, 대선에서 불법이 낄 여지를 감시하지도 못한다. ‘보수의 대참사’가 일어났으므로 진보정권에 차례를 넘기는 것이 순리지만, 세력 균형이 깨진 대선판은 반드시 대규모의 불복세력을 생산한다. 그건 지금보다 더 큰 정치적 재앙이다. 야당과 함께 쓰나미정국을 헤쳐 나가려면 새누리당 장례식을 얼른 치르고 조속히 신보수 정당을 신축하는 것이 순서다. 개헌은 차기 정권의 순산(順産) 이후에나 착수할 과제다. 현재의 정당 구도로는 탄핵, 개헌, 대선의 동시 수행이라는 과제를 감당할 수 없다. ‘한국 2016년 겨울’, 여행은 시작되고 길은 묘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