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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2016년 11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 겸허해지는 경험들

정소연 변호사


겸허해지는 경험들

정소연(사회복지01-09) 변호사



사람을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사람이 겪는 고통, 제도가 주는 압박,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 일상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힘, 그 모든 것들을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변호사가 되고 잊을 만 할 때마다, 흔들릴 만 할 때마다 새삼 이렇게 생각할 일들을 만난다.


변호사로 많은 사건을 만나지만 나는 결국 남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에 기껏해야 한 번 일어나는 일에 잠시 쓰이는 도구 같은 역할이다.


나는 힘이 되어 드리겠다는 고상하고 따뜻한 말만 하면서 일하지 못하고 있다. 아 그러니까 그건 안 된다니까요, 안타깝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라는 말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 모른다. 그건 시효가 지났고요 저건 다투려면 다툴 순 있지만 시간이 더 많이 걸리고요 아 그건 형사가 아니라 민사고요, 아니 그러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사실관계를 다시 말씀해 보시라니까요, 아가씨가 아니라 변호사라니까요, 그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고요, 변호사가 될 것 같은 일을 된다고 하지 안 되는 일을 다 된다고 하면 그게 사기꾼이지 변호사인가요, 선생님 제 말 좀 들으세요, 언성을 높일 때도 많다. 짜증도 낸다.


그렇지만 내 앞에 있는 사람들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늘 상냥할 수도 늘 의욕이 넘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언제나 내가 상대방보다 ‘그 일’을 적게 경험한 사람이고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점만은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법적 절차라는 낯선 정글 안에서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는, 작고 안온하고 평화로운 세계에서 펜대를 굴리며 살아왔고 이미 규칙을 알고 그 속에 서 있는 나라는 인간이 상상해 보지도, 경험해 보지도 못한 비범한 힘이 있다.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분노도 있고, 내가 결코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용서와 이해, 훨씬 더 넓은 시각과 깊은 통찰도 있다.



요전에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만한 형사사건을 하나 맡았었다. 뉴스에서 본다면 “인간이 어찌 그런”이라는 말이 오가고 혹여 인터넷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평생 감옥에서 썩어야 한다” 따위의 댓글이 줄줄이 달릴 법한 일이었다. 나는 가해자의 대리였다. 그러나 가해자에 대한 선처를 구한 것은 멀쩡히 살다 하루아침에 인생이 뒤바뀌는 날벼락을 맞은 피해자 쪽이었다. 그는 나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후 가해자를 위해 수 페이지에 달하는 탄원서를 보내왔다.


“이 부서지기 쉬운 배도…시련과 실수의 파도를 넘어, 상처받은 이들을 태우고 위안과 희망을 전하고 항해를 꿈꿀 수 있도록, 부디 넓게 바라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가해자’를 위한 ‘피해자’의 글이다.


세상에는 이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곳곳에 있다. 당신은 아마 저런 글을 법원 앞에 써 낼 수 있었던 여성/남성/아주머니/아저씨/아이/노인을 길을 지나며 짚어내지 못할 것이다. 학력도 나이도 경제력도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저기 저 분이에요” 라고 하면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우리가 가진 강한 사람의 외양에 대한 선입견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내면의 힘 역시 그만큼 일상적이고 평범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굳이 밖으로 보이지 않을 뿐 세상 여기저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 마냥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면서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어떤 순간에, 나보다 강하다. 어쩌면 모든 사람에게는 이런 힘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살고 싶다.



*정 동문은 2006년 대학문학상 소설 부문 가작을 받았습니다. 모교 사회복지학과, 철학과를 졸업한 후 변호사로 일하고 있으며 현재 사회복지학과 석박사통합과정에서 수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