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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호 2021년 3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즐기는 자가 이기는가, 이기는 자가 즐기는가

최재경 작가·유튜브 ‘초이스스토리’ 크리에이터


즐기는 자가 이기는가, 이기는 자가 즐기는가





최재경
국문90-95
작가·유튜브 크리에이터(채널명 ‘초이스스토리’)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청개구리형 인간 둘이 만나서 결혼을 하면 튀는 방향을 예측하기 힘들다. 각각 혼자일 때는 현실에 묶여있으면서 그저 동경만 하던 삶을 우리는 기어코 실행하고 말았다. 월급 잘 주는 직장을 30대 중반에 때려치우고 그간 모은 돈을 들고 유학을 떠났다. 물론 제정신이냐고 말리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우린 자유의 대가 따위 계산할 줄 몰랐다.

둘 다 서울대 나왔으니 무슨 공부든 잘 할 줄 알았는데, 외국어로 공부해서인지 입시공부에 길들여진 때문인지 공부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그나마 낮이 긴 여름은 늦게까지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며 스트레스를 날렸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춥고 긴 겨울 밤이 문제였다. 우리는 자구책으로 밤마다 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2인용 게임이 가능한 보드게임만 골라서 밤마다 엑셀 파일에 대전표를 기록하면서 실력을 겨뤘다. 우리의 게임 컬렉션은 점점 늘어났고, 같은 학번 부부의 게임 실력은 비슷해서 하루는 내가 져도 다음날에 이기는 식이니 꽤 오랫동안 사이 좋게 게임을 했다.

당시 가장 월등하게 재미있어서 오랫동안 반복했던 게임은 D게임(게임명을 공개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이었는데, 다양한 카드를 구매할 수 있는 화폐 카드와 특정한 액션을 할 수 있는 액션 카드가 섞여 있어서, 두 카드를 적절히 섞어서 사용하면서 건물도 짓고 마을도 건설하고 전쟁도 하면서 나만의 영지를 확장해가는 게임이었다. 매일 밤 상상의 세계 속에서 나의 도서관도 짓고 와인셀러도 짓고 축제도 열고 하다 보니 현실의 고통은 재미 뒤로 묻히곤 했다.

그 무렵 남편은 잘 때마다 아이팟으로 이어폰을 끼고 팟캐스트를 듣곤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보드게임에 관한 팟캐스트를 듣기 시작했다. 내가 D게임에 관한 것도 있냐고 물었더니, 남편은 그날 밤 듣기 시작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의 특별한 내용은 없다고 했다.

다음날 밤, 전날처럼 D게임을 했는데 3판 모두 남편이 이겨버리는 걸 보고서야 뭔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은 팟캐스트에서 ‘D게임에서 이기는 비법’을 들었다고 실토했다. 듣고 보니 그 방법이란 화폐 카드와 액션 카드를 골고루 모아 사용하지 않고, 무조건 화폐 카드부터 모으는 것이라고 했다. 당장 다음날부터 나도 그 비법을 게임에 적용했다. 우리는 다시 막상막하가 되었고, 의회 만들고 성당 짓고 이런 건 다 뒷전이고 무조건 화폐 카드만 모아들였다. 화폐 카드를 더 많이 더 빨리 모으는 사람이 무조건 이겼다. 지름길을 알아낸 기쁨에 다음날에도 우린 같은 방법으로 게임을 했다. 그러다가 사흘도 지나지 않아 우리는 그 게임을 그만두게 되었다. 게임에 이기는 법은 알아냈지만, 게임의 재미는 싹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D게임의 재미는 나만의 개성과 노력이 깃든 마을을 만들어내는 데 있었는데, 우린 둘 다 마을을 짓는 일에 흥미를 잃었고, 화폐만 모아 이기는 일엔 더더욱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길어진 유학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들어온 지 이제 2년 반이 지났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은 그간 자신들이 쌓아 올린 지위와 부동산 자랑을 늘어놓았다. 다행히 우리는 유학시절 보드게임을 하면서 매일 밤 지는 연습을 했기에 별로 속상하지 않았다. 청개구리 1호는 2호에게 “괜찮아. 우리는 그들과 다른 게임을 하고 있어”라고 말해준다. 청개구리 2호는 1호에게 “맞아. 결국 즐기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D게임 기억나지?”라고 응수했지만, 현실게임에서 이기는 법을 가르쳐주는 팟캐스트가 있다면 거부할 자신은 없다.



*최 동문은 모교 졸업 후 인디애나대 신문방송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장편소설 '반복', '플레이어', 소설집 '숨쉬는 새우깡' 등을 낸 소설가이자 다큐멘터리 필름메이커다. 대학시절 최리라라는 이름으로 015B의 작사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유튜브 채널'초이스스토리(바로가기)'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