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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호 2021년 11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청춘의 화두(話頭)

이순형 수필가


청춘의 화두(話頭)



이순형
농공70-74
수필가

 
수많은 승려들이 화두 하나씩을 안고 평생을 고민하며 수행한다. 그렇다고 화두가 승려들에게만 주어지는 숙제는 아니다. 숭례문을 복원한 대목장(大木匠)은 어린 나이에 목수의 보조공으로 전통집짓기에 입문했다. 어느 날 집을 짓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늙은 스님이 화두 하나를 던져주고 갔다. 

 “집이 뭐꼬?”

훗날 한국 최고의 대목장이 된 그는 어린 시절의 어느 날 낯모르는 스님이 혼잣말처럼 던지고 간 그 화두에 매달려 평생을 살다가 여기까지 왔다며 빙긋이 웃었다. 

나도 대학교 1학년, 어린 시절에 얻은 화두 하나에 사로잡혀 일흔 살이 되도록 고민하고 있다.  

1970년 입학생들은 모두 공릉동에 있는 공대 캠퍼스 속의 ‘교양학부’ 건물에서 1학년을 보내야 했다. 반편성이 묘해서 농생대 신입생은 사범대학교 학생들과 섞여 공부했는데, 내가 속한 반에는 여학생이 더 많아서 소년티를 겨우 벗은 젊은이들은 가슴 설레며 공부하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던 어느 봄날 학교 게시판 한 귀퉁이에 작은 메모가 눈길을 끌었다. 수원출신 신입생들은 공과대학교 기숙사로 모이라는 부름이었다. 동급생 친구와 찾아가니 수려한 용모의 공대 2학년 ‘류’선배가 맞아주며 경기고를 졸업하고 전자공학과 2학년이라고 자기를 소개하였다. 이름대로 ‘KS마크’였다. 잠시 후에는 기계공학과 3학년 최선배도 합류하였는데, 불과 1~2학년 차이지만 내 눈에는 하늘처럼 높게만 보였다. 그 무렵, 저녁마다 열리는 소주파티는 고등학교 때 맛보지 못한 자유의 신천지로 안내하였고, 추천해주는 책에는 세상의 철학적 진리가 모두 담겨 있는 듯 했다.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던가!  하지만 그렇게 정신없이 선배들을 따라 다니다가 첫 학기 성적표를 보고 기겁하였다.  “공릉고등학교 4학년, 서울대학생은 대학공부도 입시공부처럼 해야 하느냐?”고 타 대학 여학생들이 놀리던 말뜻을 그제야 깨달았다. 다행히 썸머스쿨에서 보충수업을 해서 겨우 2학년으로 진급하여 수원에 있는 농생대캠퍼스로 갈 수 있었다. 

수원캠퍼스(지금은 관악캠퍼스)에 다니면서도 공대에서 만난 선배들과는 같은 고향, 수원이라서 주말이면 자주 어울렸는데, 어느새 선배들은 졸업 후의 진로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어있었다. 

그 시절, 류 선배는 수원출신 대학생들이 만드는 동인지에 의미 있는 글을 실었다. 첫 문장이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라는 인간은 무엇이며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로 시작하였다. 묵직한 의문이 머리를 때리는 기분이었다. 막상 류선배도 해답은 없었다. 함께 어울려 다니던 농생대는 물론이고 법대, 상대의 선배들도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무슨 개똥철학으로 답변해주었다. 도토리 키 재기라고나 할까. 하지만 내게는 평생을 관통하는 화두가 되었다. 

졸업한 이후로는 그 선배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다. 나는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비지땀을 흘렸고, 아주 가끔 그 선배들은 대기업의 성공가도를 달려가고 있다는 소식만 들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IMF사태를 맞아 덮쳐온 쓰나미를 피하지 못하고 잘 나가던 우리 회사도 부도가 났다. 결국 한창 일할 나이의 40대 중반에 백수가 되어 서리 내리는 들판에 내동댕이쳐졌다. 

궁리 끝에 별 수 없이 창업을 해야 했다. 아파트 거실에서 혼자 회사랍시고 사업자등록을 하고 말단사원 겸 사장노릇을 시작하였다.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 미친 듯이 해외시장을 개척한 덕분에 삼년쯤 지나니 서광이 보였다. 
십년쯤 지나니 공장도 마련하고 사업기반을 잡았다. 그 동안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화두는 끊임없이 나를 성찰하게 했고 힘들 때마다 일으켜 세웠다.  

어느 날 화두를 던져준 선배가 생각났다. 안테나를 높이 세우니 희미한 발자취가 전파처럼 잡혔다. 모 대기업의 CEO로 근무하다가 IMF사태로 퇴출되었고, 뜻밖의 소송을 당해 거액을 물어주었다고 한다. 불운은 혼자오지 않는다더니 지금은 대인기피증까지 얻어 칩거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선배가 후배가 될 수는 없는 터라 ‘화두’의 답은 찾았는지 묻고 싶었다. 어렵게 통화가 되자 한참 기억을 더듬다가 아는 체를 해주었다. 

부부동반으로 만난 감격적인 해후는 웃음판이었다. 세월은 갔지만 선배는 잘 웃는 표정과 귀족의 풍모까지 그대로였다. 대학시절로 돌아가 함께 몰려다니던 선배들의 근황을 물으며 추억을 되새김질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후에 아들을 장가보낸다고 청접장이 날아왔다. 선배의 결혼식을 본 것이 지난해처럼 또렷한데 아들을 장가보낸다니 세월의 자취가 흑백영화처럼 지나갔다.  

이듬해에 탄핵정국이 무르익고, 광화문에서는 주말마다 태극기를 휘날릴 때 나도 흰 머리칼을 날리며 광장에 나가 시국을 개탄하였다. 백발의 지성인들은 “백억 불 수출”이 국가 목표였던 시절에 보리고개를 이기고 세계를 누비며 이룬 우리들의 성과가 부정당하는 기분이라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 무렵 서울대 동문들의 여러 카독방에는 가슴은 뜨겁지만 얼굴만 낡은 애국지사들의 이름이 넘쳐나고 있었다. 많은 이름 중에서 신입생시절에 만났던 최선배의 함자가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확인하자 그렇다고 했다. 다짜고짜로 “형님!” 외치자 오래 막혔던 통로가 트였다. 주말에 다시 태극기집회에서 만나 선후배들과 어울려 우리는 대학시절로 돌아갔다. 

최 선배는 졸업하고 여천석유화학단지를 시작으로 플랜트전문 기술자가 되어 인생외길을 달렸다고 한다. 중동의 수많은 석유화학공장, 대만의 플랜트, 텍사스의 화학단지까지 40년이 넘도록 쇠붙이에 숨결을 불어 넣었다고 하니 참된 애국자의 길을 걸었다. 지금은 은퇴하여 그 동안 떨어져 살며 나누지 못한 사랑을 연애하듯 즐긴다고 형수를 보면서 웃었다. 

인생의 석양에서 추억이 담긴 최선배님을 자주 만나자 그 옛날의 화두가 떠올랐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문득 김상용시인의 글에서 답을 찾았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
 ········
 왜 사냐건 
 웃지요. 
 
 화두의 답을 나이 70이 돼서야 찾은 기분이다. 그래도 찾기는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pksunnylee@naver.com 옛친구들이 혹시 연락 주려나?)


*이 동문은 모교 농생대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2010년 '계간수필'로 등단, 수필가로 활동하며 수필집 '월급봉투', 여행에세이 '서방견문록' 등을 냈다. 국제상사주식회사 기계부, 수산중공업 해외영업부, 과천라이온스클럽 회장을 역임하고 현재 파워킹 대표이사, 과천문인협회 회원, 계수회, 수수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농생대 상록문학상 수필 부문 심사위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