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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호 2021년 7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이름이 두 개다

남용운 연구원 겸 소설가 에세이

이름이 두 개다




남용운
(필명 남세오)
원자핵공학94-98
연구원·소설가


이름이 두 개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소설가로서 처음 글을 내기 시작했을 때 평생 연구원으로 또 개인으로 살아오며 썼던 본명 대신 필명을 썼다. 이유는 단순했다. 소설도 쓰는 연구원이나 연구원 출신의 소설가가 아니라 그냥 연구원이고 그냥 소설가이고 싶었다. 평범하게 연구소에서 일하며 소소한 취미 생활을 즐기는 연구원인 동시에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가끔 소설을 써서 어딘가에 올리는 작가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민망했던 탓이기도 하다. 요새야 그런 생각이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무릇 실험실이라면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하고 연구원이라면 하늘을 보고 걷다 구덩이에 빠질 정도로 항상 연구만을 생각해야 한다고 여겨지던 때가 그리 먼 과거가 아니다. 여전히 주변에는 그렇게 연구에 열정을 바치는 동료가 적지 않기도 하다. 그런 동료와 같은 월급을 나눠 받으며 머리 한 구석은 소설 쓰기를 위해 비워 놓고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실을 말하자면 소설 쓰기는 연구를 하다가 잠깐 머리를 식히는 취미 활동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독서로 머리를 식힐 수는 있다. 하지만 똑같이 책을 매개로 한다고 해도 읽는 것과 쓰는 것은 전혀 다른 과정이다. 연구와 소설 창작은 모두 무언가를 소모하는 행위고 소설을 열심히 쓰는 만큼 연구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는 걸 솔직히 밝힌다.

그래도 나 스스로 지키려는 선은 있다. 연구원 한 사람의 몫은 하려고 한다. 단순히 하루 여덟 시간의 근무를 채우겠다는 뜻이 아니다. 소설에 한눈을 팔면서도 연구에 열정을 바치는 동료만큼의 몫을 하려고 한다. 내가 잘나서 동료보다 적은 시간을 쓰고도 같은 양의 연구를 할 수 있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내가 뛰어난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제 연구는 골방에 틀어박힌 연구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그렇다. 연구는 대규모의 공동 작업이며 내가 몸담고 있는 핵융합과 같은 거대과학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 협업의 과정에서는 안타깝게도 모두가 주역이 될 수는 없다. 누군가는 더 뛰어난 연구자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해야 하고 다른 연구자의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야 한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연구란 인류 전체를 위해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공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탐구욕을 채우기 위한 지극히 사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연구자들은 누구나 후자를 포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쪽에 치우친 사람이 더 큰 업적을 달성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원하는 연구를 마음껏 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자신의 학문적 열망을 자제하고 조연이 되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변명이고 또 자기 미화이기도 하다. 그래도 내가 내린 선택은 그랬다. 그렇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다는 게 나름대로의 냉정한 결론이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니 탐구욕이 채워지지 않았고 그만큼의 성취감도 잃어버렸다.

탐구욕과 창작욕이 같은 그릇에서 퍼내는 물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더군다나 소설 쓰기는 연구와는 달리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불이 꺼지지 않는 밤에 논문 대신 소설을 쓰며 아이러니하게도 내 삶은 균형을 회복했다.

얼마 전에 ‘중력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SF소설집을 냈다. 신인 작가로서는 벅찬 행운이다. 그런데 균형이 조금 위태로워졌다. 가끔 소설을 써서 어딘가에 올리는 것보다는 좀 더 본격적인 작가가 되어 버렸다. 아예 다른 사람인 척 시치미를 떼기가 번거롭고 유난스러워 연구원이자 소설가라고 다 밝혀 버렸다.

그러니 이제 그냥 본명을 써도 상관없겠지만 나는 여전히 이름 두 개를 쓰는 게 더 마음이 편하다. 각각의 이름으로 한 사람 몫을 하고 싶다. 그 이유를 늘어놓다 보니 아홉 매 분량이 꽉 차 버렸다. 해답도 단순하지 않을 것 같다. 소설가로서 맡을 수 있는 역할을 찾는 중이다. 한 사람의 연구원인 동시에 한 사람의 소설가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려면 당분간은 좀 바빠야겠다.



*남 동문은 모교 원자핵공학과에서 학사·석사·박사를 마친 뒤 한국핵융합연구원에서 플라즈마진단팀장을 맡아 핵융합 장치인 KSTAR를 연구하고 있다. ‘브릿G’와 환상문학웹진 ‘거울’에 ‘노말시티’라는 아이디로 글을 올리며 최근 ‘남세오’라는 필명으로 SF단편집 ‘중력의 노래를 들어라’를 출간했다. 

▷남세오 동문의 소설 읽기: https://www.notion.so/normalcity/342742d7ae0744729c04f4f95c6fd3c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