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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호 2021년 8월] 기고 에세이

동숭로에서: 장맛비

이상규 한국수필문학진흥회장·에세이문학 발행인

장맛비



이상규
영문65-69
한국수필문학진흥회장·에세이문학 발행인
전 LG화학 부사장
 
 지구 온난화가 세인들의 관심사가 된 지 오래다. 한반도도 점점 아열대 기후로 바뀌어 고창이 북쪽 경계선이던 동백꽃이 요즈음은 서울 근교에서도 활짝 꽃을 피운다. 온화한 날씨로 한강이 얼지 않은 채 겨울을 나고, 봄이 올 듯 말듯 여름도 그냥 지나가나보다 했더니, 장마철이 들면서 갑자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고개를 넘어서려는 직장 생활 중요 고비에 위암 판정을 받았다. 이제 사회생활이 끝인가 싶었다. 민둥산처럼 벗겨진 머리를 떠올리며 좌절의 문턱에서 헤매던 내게 초기라서 항암치료는 안 받아도 된다는 의사의 말은 희망의 끈을 다시 잡게 했다. 무리하지 말라는 아내의 청에도 불구하고 회복을 서두르는 마음에 퇴원 다음날부터 인근 아차산에 올랐다. 첫 날은 산 입구, 둘째 날은 약수터, 셋째 날은 팔각정까지 차츰 고도를 높여갔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꼬박 1년을 그러게 하자 건강이 좋아지고 종래는 5년 장애기간을 넘기고 환자의 옷을 벗었다.

  큰 병치레는 없었지만 체력이 부족하고 근래 허함이 더해진 듯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산을 찾은 것이 지난 7월 들어서다. 장마가 그치고 폭염을 피해 휴가를 서두를 철인데 올해는 장맛비가 계속 내린다. 그 때문인지 여름의 전령인 매미 울음소리도 좀 약해진 듯하다. 새벽에 아파트를 나서자 경내에서는 메타세쿼이아가, 큰길가에는 플라타너스가 무심히 나를 맞는다. 신호등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길을 건널까, 아니면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계단을 오를까 주저한다.

몸은 쉬엄쉬엄 가자하고, 마음은 빨리 가자하면서 가벼운 실랑이를 한다. 그냥 발 가는대로 가자면서도 요리조리 재는 자신이 궁상스럽다. 주유소 건물 가운데 걸린 시침이 5시를 넘으면 서둘러야지 하는 조바심에 발걸음이 빨라진다. 주민 센터 옆 좁은 가게 골목은 화분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빵 맛있게 굽는 일이 얼마나 힘드시냐는 위로의 말에 고마워하던 여주인의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산 초입에 주민들이 분양받아 운영하는 텃밭에는 상추, 고추, 가지가 듬성듬성 나 있고 초록색 명찰들이 주인을 알리고 있다. 몇 차례 응모에 낙방하고 이듬 해 시기를 놓치고 하여 도농의 작은 꿈조차 버렸다. 시원하던 보슬비가 굵은 빗줄기로 변해 우산 사이로 스며들어 옷을 흠뻑 적신다. 나무계단으로 바뀐 팔각정 오름길은 빗물이 넘치고 대성암 가는 산길은 시냇물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한다. 운동기구에 거꾸로 매달려 서쪽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지척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보름달의 출현에 흠칫 놀란다. 그러다 비 그치고 구름 사이로 해님이 깜짝 얼굴을 내밀면 온 세상이 다시 탄생하는 듯하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 같이…
 
아차산성 복원을 내세운 지자체의 선심성 공사로 흙길은 깔끔한 포장길로 바뀌고 계곡에는 앙증맞은 다리가 무지개처럼 걸려있다. 둘레 길도 정비되고 작은 야외무대에는 바이러스 감염 방역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세요.’라는 테이프가 의자 위에 붙어 있다. 그새 영랑의 시가 새겨진 시석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문명이 원시를 밀어내버린 것인가. 샘터는 그 위치에서 물맛도 여전하나 떠 마시는 주걱 대신 스테인리스 벌브가 마음에 부대낀다. 옹크린 두 손으로 약수를 받아 가만히 얼굴에 끼얹고 목젖을 넘기니 가슴속까지 찌르르해온다. 힘들여 오른 화강암 언덕 ‘팔각정’은 단장을 하고 명판도 ‘고구려정’으로 바뀌어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세요.’라는 주의사항이 발길을 멈칫하게 한다. 

정상은 아침 산책길로는 너무 멀어 대성암까지로 만족한다. 그새 암자 이름도 ‘구혈암’으로 바뀌어 있다. 사찰 세계에서도 주인이 바뀐 건지 모르겠다. 동편으로 예봉산과 검단산이 묵묵히 인사하고 한강을 가로질러 새 다리가 하나 걸쳐 있다. 10킬로 마라톤 연습차 잠실철교 쪽에서 목표점으로 뛸 때 건설 중이던 구리‧암사대교의 완성품이다. 그 사이에 아파트들이 빽빽이 들어서서 자연의 푸름을 좀먹고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다. 체력장도 다양한 기구들로 제법 모양새를 갖추고 있지만 찾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몇몇 부지런한 새벽 족들이 정담을 나누면서 운동기구에 몸을 흔들고 있다. 세월이 흘러 자연인이 많이 바뀌었을 텐데도 나보다 나이 많은 노익장들이 여전한 것이 의아스럽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갑자기 야호 소리가 새벽 공기를 흔든다. 그 발성 음이 귀에 익다. ‘야-호, 야아-호.’ 반가운 김에 맞대응해서 소리라도 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머리가 약간 벗겨진 바로 그 노인일까, 아니면 노하우를 전수받은 다음 세대의 목소리일까. 그러나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 다정히 인사를 건네던 그 싹싹한 중년과, 백발 할머니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옹달샘 앞에 쪼그려 앉아 얼굴에 찬 물을 끼얹고 일어서는데 의자에 앉아 있던 한 등산객이  말을 건넨다.

“지난번에 모자 두고 가지 않았어요? 찾으셨군요.” 

샘터 돌 머리에 덩그러니 놓인 파란 모자가 새벽 산행객들 눈에 띄었나 보다.

“예, 내려가다 생각이 나서 바로 올라와서 찾아갔습니다.”

나의 멋쩍게 웃음과 조그마한 일탈이 새벽 산 속에서 묘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갑자기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시야가 뿌예지고 젖은 바지가 순식간에 허벅지에 거미마냥 착 달라붙는다. 물에 불어 무게를 더한 등산화가 몸의 중심을 잡아준다. 뛰어가기에는 집까지 거리가 너무 멀다. 비 맞고 가다가 쉼터에서 좀 쉬고, 그치는 것 봐서 또 가자고 마음을 먹는다. 몇 사람이 정자에 들어선다. 급할 것 없다 싶어 그냥 서서 빗발이 약해지기를 기다린다. 마음은 호수같이 편하다. 비 맞으며 신나서 뛰놀던 동심이 하늘의 축복인양 되살아난다. 콸콸 흐르는 계곡물이 산새와 어울려 숲속 요정의 심포니를 연주 하고 매미와 귀뚜라미가 합창을 한다. 곧 가을이 오려나 보다. 

어느덧 가늘어진 빗줄기가 하산 길을 재촉한다. 주유소 앞 시계를 보니 겨우 15분이 늦다. 평소 내가 얼마나 여유 없이 지내길레 하는 생각이 든다. 생쥐처럼 젖은 몸을 하고 들어오는 나를 보고 아내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우산 안 갖고 나갔다고 나무란다. 그 뒤로 TV에서 서울지방 방역대책 강화 고지와 함께 태풍이 오고 있다는 뉴스를 전한다. 그렇구나, 장마가 지나면 태풍이 왔었지. 지구 온난화로 기후변화가 심해서 한동안 잊고 있던 태풍이 결국 오고야 말 것 같다. 문득 더위를 식혀주고 땅에 수분과 영양을 주어 흙을 기름지게 하는 장마가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