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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2016년 11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5000만 인구의 딜레마

정상욱 미국 럿거스대 석좌교수



5000만 인구의 딜레마


정상욱(수학75-82) 미국 럿거스대 석좌교수



현재 대한민국 인구는 약 5,000만이다. 전쟁 직후에 2,000만이 조금 넘던 것에 비하면 두 배가 넘게 늘어난 것이다. 국민소득 또한 3만 배 이상 증가해 ‘한강의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폭발적 경제 성장을 이뤘다. 인구수나 경제규모 면에서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국가가 된 것이다.


대한민국이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는 데 가장 유효했던 전략은 선진국을 모델로 삼아 후발 주자로서의 이점을 살리는 것이었다. 기술·과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선진국을 빠르게 모사해 근접한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고, 빈약했던 과학의 저변을 성공적으로 확대시켰다.


그러나 이제는 선진국에 비해 뒤처졌다고 해서 모든 분야를 무조건 따라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많은 분야에서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더 나아가 그들을 앞서려고 하는 이 시점에는 과거의 전략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저변 확대가 끝났으니 특정 분야에 집중해서 어느 누구와 경쟁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분야를 육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합리적인 선택과 집중이 새로운 가치가 되고 그 결과로서 선진화 된 분야가 점차 많아지면 비로소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일찍이 화제가 됐던 패스트 팔로워와 퍼스트 무버라는 용어로 대변되는 두 가지 개념은 후발 주자와 선두 주자 간의 치열한 경쟁에서 늘 대비되는 전략이었다.


대한민국이 퍼스트 무버로 변신을 꾀한다면, 즉 기반 확충을 마치고 특정 분야를 선도하는 경쟁력을 갖추고자 한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흔히 성장을 이끄는 요소로 자본, 기술, 인구 등을 꼽는다. 이 중 인구라는 요소에 주목해보자. 세계화 시대에 정보와 자원은 쉽게 국경을 넘나들지만 사람은 각 국가의 주체이며 쉽게 옮겨질 수 없다. 따라서 인구는 다른 요소에 비해 조정이나 통제가 어렵다.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에 가장 중요한 제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른바 5,000만의 딜레마다. 즉, 선택과 집중의 과정에서 인구 규모로 인해 선택할 수 있는 과학 기술 분야의 수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소수의 분야만을 살려야 한다.


일례로 얼마 전 노벨상 시즌을 맞이하여 화제가 되었던 국가 연구개발비의 예를 들고자 한다. 당시에 있었던 지적 중 하나는 GDP 대비 연구개발비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데도 불구하고 과학분야 노벨상이 아직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연구개발비의 비율은 계속 높아져 2011년 이후로는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비율이 주는 함정에서 벗어나 실제 연구 개발비의 규모를 비교하면 상황은 크게 다르다. OECD 전체의 규모를 100으로 할 때 미국과 유럽을 합치면 70에 이르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6 정도이며, 일본의 13과 비교해도 반이 되지 않는 규모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인구차이를 볼 때 이 차이는 인구수에 따른 냉혹한 한계임이 명확하다. 흥미로운 것은 인구대국인 중국은 27 정도인데 인구수와 앞으로의 경제 성장 여력을 생각하면 훨씬 큰 연구비 시장으로 커질 것임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규모의 한계를 직시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연구비가 아무리 GDP 대비 비율이 크다고 해도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규모가 될 수 없으며, 그들이 하는 모든 연구에서 경쟁하는 것은 불가능한 구도인 것이다. 규모가 큰 선진국만큼 많은 분야를 선택해서 경쟁할 수는 없으며 우리의 인구수에 맞게 연구 분야의 수를 제한해야 한다. 5,000만이라는 인구 규모는 우리에게 이러한 연구 분야 선택의 과정을 더욱 치열하게 제한할 것을 강제한다.


단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것은 중국과 대만이다. 현재 중국은 과학원 산하에 100여 개의 연구소를 두고 대규모의 프로젝트들을 진행 중이다. 가히 그 규모는 모든 과학 분야에 걸쳐 있다고 하겠다. 사실 인구 규모가 13억을 넘는 중국에 있어서 연구비 분배 문제는 오히려 쉬운 것이다. 성장 중인 경제와 인구를 믿고 모든 분야에서 경쟁을 해도 무방한 것이다. 이른바 선택 없는 집중이 가능하다. 반면에 대만의 경우 우리의 절반에 못 미친다.
그들의 과학기술 연구 중에서 대규모 과학 프로젝트는 방사광 가속기나 고성능 투과전자 현미경 등 몇몇에만 집중된 모습이다. 그것이 자국의 규모를 철저히 고민한 끝에 내린 합리적인 전략임을 눈여겨봐야 한다.


우리의 경우에는 어떤가? 어떤 과학 또는 기술 분야에서 우리가 뒤떨어져 있음을 알게 될 때 무조건 어떻게 선진국을 따라 잡고 선도할 수 있는지 고민한다. 개발도상국 시절의 습관으로 인한 조바심이 작용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많은 분야에 흩어진 역량이 나라의 경쟁력을 높이지 못하고 있는데, 아직까지 요원한 과학 분야 노벨상도 그런 결과물일 것이다.


치열한 경쟁으로 자연스레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는 경제 분야에 반해, 정책 결정에 의존하는 과학 기술 연구비의 투자는 합리적인 선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의 잠재력이 어떠한 분야든 모아진다면 세계를 선도할 수 있고 이미 여러 분야에서 그러하지만, 결코 모든 분야를 선도할 수는 없다.


나라의 규모를 직시하는 사회적인 공감대와 합리적이고 순수한 과학적인 동기에 기반한 선택이 필요한 때다.

선택과 집중이 없는 무분별한 선진국 따라 하기, 정치적인 포퓰리즘이나 지역 안배만을 따지는 비합리적인 연구비 분배 등이야말로 경쟁력을 저해하고 있다. 앞으로는 5,000만의 인구수가 주는 한계에 더해 저성장의 늪과 고령화로 인한 인구 구조의 변화로 합리적인 선택과 집중이 더욱 절박하게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