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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호 2016년 2월] 뉴스 기획

1950년 안면도 방언조사 보고서 기증

역사자료 추억담- 강신항(국문49-53)성균관대 명예교수




1950년 6월 개강 직후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는 충남 안면도로 방언조사를 떠났다.(사진1) 당시는 신년 새학기가 6월에 시작했다. 그달 3일부터 9일 사이에 다녀왔으니 전쟁 직전 평화로운 한때의 모습이다. 모든 자료들은 고향 충남 아산에 옮겨 둔 것을 어머니가 꼼꼼히 보관해주셨다. 


지도교수로 국어국문학과 이숭녕·방종현 교수, 철학과 민태식 교수가 동행하고, 단원으로 4학년(김용경, 전광용, 임헌도), 3학년(김석선), 2학년(고정기, 성기설, 강신항, 이정숙, 정양완) 학생들이 참여했다. 49학번 동기들은 대개 스무 살 언저리였지만 선배들은 나이 편차가 컸다. 한두 학년 위라도 나이 차이는 열 살, 스무 살씩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주민들의 말소리를 소리나는 대로 적는 일을 맡았다. 녹음기도 없이 받아적은 이 보고서가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의 방언조사 보고서일 것이다.(2) 숙소로 묵었던 여관엔 어찌나 빈대가 많던지…. 총무였던 나는 ‘서울 여자들 고생 좀 해봐라’ 하는 짓궂은 마음으로 여학생 방을 배정해주기도 했다. 이 중 정양완 선생이 내 아내가 됐다.(단체사진 맨 뒷줄 가운데가 강신항 동문, 맨 앞줄 오른쪽 여학생이 정양완 동문)


입학 동기 스물한명 중 여학생이 넷이었는데, 그 중 ‘캠퍼스 커플’이 둘 탄생했다. 나와 아내가 커플 1호, 이기문(국문49-53) 선생과 김정호(국문49-53) 선생은 졸업 후 연애해서 부부가 됐다. 아무것도 모르고 둘 사이를 열심히 오가며 연애편지가 든 책을 전해줬던 기억이 난다. 아내와 김정호 선생은 경기여고 동창으로 절친한 사이였다.


전쟁이 나고 6월 26일 월요일에는 의정부에서 나는 포격 소리가 동숭동에서도 들렸다. 뒷산에 올라 포격전을 구경할 정도로 사람들은 전쟁이 뭔지도 모르고 순진했다. 부산에서 국방부 소속으로 군무원 생활을 하며 틈틈이 전시연합대학에 다니고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1960년부터 20년간 모교에 강사로 출강했다. 당시 개설된 강의와 출강했던 강사들의 이름이 적힌 강의시간표다.(3) 무슨 생각이었는지 ‘9월 강사료’라는 메모가 눈에 띈다. 당시 2백원이었던 서울대 강사료는 싸기로 유명했다. 1964년 성균관대에 전임이 돼 월급으로 1만5천원을 받았다.  


모교에서 전임은 아니었지만 전공과목과 교양국어까지 맡은 덕에 두루두루 제자가 많다. 문인인 정희성(국문64-68), 김만옥(국문59-63)과 고영근(국문56-61), 안삼환(독문62-66), 우리나라 최초 여기자의 딸로 유명했던 이혜순(국문60-64), 김학준(정치61-65), 반기문(외교63-70), 김창수(약학64-68) 등이 기억에 남는다. 반기문은 주미 공사 시절 학회차 미국에 간 나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김학준은 모임에서라도 보면 저 멀리서부터 ‘선생님’ 하고 뛰어오는 제자다. 


교재도 없이 선생님 말씀을 받아쓰면서 수업하던 시절이었다. 강의 도중 어떤 학생이 ‘시시하다’며 일부러 강의실 나뭇바닥을 발로 탕탕 구르면서 앞문으로 나갔다. “저 학생이 내 강의를 무시하고 나간다. 시시한 내 강의는 안 들어도 되니 제발 도서관에 가서 공부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사건이 인상깊었는지 많은 학생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학생들은 강사가 진땀을 뺄 정도로 날카롭고 도도했다. 문장력도 좋았다. 1964년~1965년에 일어난 한일협정 조인반대 운동에서 문리대 학생들은 중심 역할을 했다.(4) 요새 말로 ‘운동권’도 아니고, 그저 정의에 불타는 학생들이었다. 단과대학 중 유일하게 교모에 서울대 마크와 함께 ‘文理’ 마크를 달 정도로 자부심이 컸던 문리대였다.   


*지난 1월 21일 강신항 동문을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으로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