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8호 2018년 11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저출산, 가이아의 선택
정성희 동아일보 미디어연구소 국장, 본지 논설위원
저출산, 가이아의 선택
정성희(국사82-86)
동아일보 미디어연구소 국장, 본지 논설위원
자원고갈, 환경파괴, 분쟁과 테러, 실업과 양극화. 현대 문명의 여러 비극이 인구과잉에서 비롯되고 있다.
빙하기 한때는 1만명까지 줄어 멸종위기에 처했던 현생인류가 현재 70억명을 넘은 것은 생물의 역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굳이 맬서스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인구과잉에 대한 위기감은 소설이나 영화 등 각종 대중매체를 통해 확산되고 있다. 댄 브라운의 소설 ‘인페르노’에서는 인구 절반을 불임 바이러스로 감염시켜 인구를 줄이려는 생물공학자가 등장한다. 영화에서는 이 무모하고 황당한 시도가 주인공의 활약으로 실패하는 걸로 나오지만 원작 소설에서는 성공한다. 영화 ‘킹스맨’에서는 인구문제를 해결한다며 사람들의 머리에 칩을 심어 살상하는 미치광이 사업가가 등장하고, 마블의 세계관을 반영한 영화 ‘어벤저스-인피니티워’에서는 우주 전체의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려는 악당이 등장한다. 황당한 설정이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인구과잉이 인류의 최대 난제라는 점에는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한다.
하지만 시선을 내부로 돌리면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합계출산율 1%가 무너지며 우리나라가 초저출산 국가로 들어섰다는 경고음이 요란하다. 지난 10년간 정부는 122조원을 저출산 대책에 쏟아 부었지만 올해 2분기 합계출산율은 0.97명으로 곤두박질쳤다. 출산에 관한 한 백약이 무효인 셈이다. 왜 그럴까. 출산은 돈 몇 푼의 문제가 아니라 그 나라가 살 만한 나라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과 관련돼 있다. 우리는 그 점에서 실패했다. 자살률 1위는 현재가 힘겹다는 말이고, 출산율 최저는 미래에 희망이 없다는 얘기다.
지구적으로 인구폭발이 인류문명과 지구생태계를 위협하는데 국가 차원에서는 국가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분명히 혼란스럽다. 인구과잉과 초저출산, 무엇이 중요하며 우리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하나. 흔히들 생태적으로 인구는 줄어야 하지만 국가의 지속가능성이란 측면에서는 인구가 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 두비오 프로 나투라(In dubio pro natura·의심스러우면 자연에 물어라)’. 해법을 찾기 위해서는 자연과학적 관점이 필요하다. 동물은 먹이를 구하기 어렵고 짝짓기가 힘들어지면 새끼를 낳지 않음으로써 적정한 개체수를 유지한다고 한다. 사는 게 힘들어 아이를 안 낳겠다는 여성들의 선택과 다를 바 없다. 여성 차별이 여전하고 경쟁과 스트레스가 심한 사회에서 출산을 기피하는 건 집단지성이 낳은 합리적 선택이 아닐까. 출산 기피는 여성들이 하는 게 아니다. 남녀 국적 이념을 떠나 젊은이들의 관심사가 재생산에서 삶의 질 문제로 급격히 이동하고 있다.
돈만 들고 효과는 없는 저출산 대책을 이쯤에서 포기하고 우리도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인류 최초로 직면하는 고령사회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시작이다. 노인기준을 상향조정해 생산가능인구를 늘리고 시스템 전체를 고령친화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비스마르크가 연금을 받는 노인 연령을 65세로 정할 때 독일남성의 기대수명은 47세였다고 한다. 지금은 70대에도 건강하고 일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이 있는 분들이 허다하다. 다행스럽게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정보 과학기술의 기반은 충분히 뒷받침되고 있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살아있는 사람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대하는 것이다. 가정과 학교로부터 방기된 거리 밖 청소년만 해도 20만명이다. 결혼이주 여성이 데리고 들어오거나 외국인 근로자가 낳은 무국적 아동만 2만명이고 한 해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사람이 1만3,000명이나 된다. 이들만 잘 보살펴도 낮은 출산율을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른다. 이렇게 하면 다시 아이 낳는 세상이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