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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호 2017년 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수묵추상의 거장 서세옥 동양화가

“가슴 열고 아늑하게 감싸면 찬 얼음도 녹지요”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 100점 기증
‘프리즈 런던’서 20세기 대가로 초청


정유년 새해, 한 해의 지혜를 구하기 위해 산정 서세옥(회화46-50) 모교 동양화과 명예교수를 찾았다. 수묵 추상의 거장이자 한학자인 서 동문은 구순의 나이에도 창작의 붓을 놓지 않고 있다. 12월 30일 솟을대문과 한옥이 인상적인 서울 성북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는 책을 읽고 낙관을 파는 작업실에서 진행됐다.




-뜰에 소나무가 일품입니다.

“여기 집 이름을 무송재(撫松齋)라 지었어요. ‘소나무를 어루만지는 집’이란 뜻이지요. 역대 수많은 선배들이 소나무를 사랑했지요. 인왕산 골짜기에 살았던 성수침 선생은 집 이름을 청송당(송뢰를 듣는 집)이라고 짓고 한 덩어리 기석을 소나무 그늘 아래 놓았었는데, 수백년 세월이 지나면서 집은 빈터만 남고 그 기석은 여기 무송재 뜰에 옮겨져 있습니다. 이 집은 창덕궁 연경당이 모델입니다. 사랑채만 한옥으로 지은 건 참 아쉬운 일입니다.”


-시국이 어수선합니다. 원로로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제가 평론을 하면 경계를 넘어서는 일이 돼요. 날고 기는 평론가들이 계신데 끼어들면 안 되지요.”


-지난 한 해는 어떠셨습니까.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세 번의 전시와 산정어록이란 책을 출간했고, 최근 백내장 수술을 받았어요. 간단한 수술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네요. 햇빛을 조심하라고 해서 외부 활동을 거의 못하고 있어요. 가을에 런던 리젠트파크에서 열린 ‘프리즈 런던 2016’에서 ‘프리즈 마스터스 스포트라이트’ 작가로 초청받았습니다. 피카소, 마티스 등과 함께 20세기 대가 21명에 들어가는 영광을 누렸지요. 국내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기증작품 전시회를 3개월에 걸쳐 했어요. 제가 2014년에 기증한 100점의 작품을 전시한 것이죠. 제 작품을 보러 21만 8,000명이 와줬다고 하니 참 고마운 일입니다. 늦가을에는 통일부 주최로 오두산 통일전망대 기획전시실 재개관 특별전에 김병기 씨와 초대받기도 했습니다.” 

 
-많은 작품을 기증하셨네요. 개인 미술관을 만들 생각은 없으셨어요.
“없어요. 아버님이 독립운동가이신데 광복군에게 군자금을 보내주는 국내 총책이었어요. 국가가 있고 국민이 있어요. 또 국민이 있어야 국가가 있습니다. 한 덩어리입니다. 아버님은 자기 몸과 재산을 모두 바쳤는데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을까. 평생 그린 작품이 전부니까 그걸 기부한 겁니다. 미술관에서 와서 직접 골라가라 했어요.”


그는 자식들도 이런 정신을 이어받은 것 같다고 했다.


“도호가 첫째고, 을호가 둘째예요. 이 아이들이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건축가가 됐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요. 도호는 작업할 때 신경 쓰인다고 머리도 밀고. 10년 전 옷을 아직도 입어요.”


-작업실에 책이 무척 많네요.
“어린 시절 대구 고향집에 책이 30만권 있었어요. 대부분 중국 서적이었고, 영어, 불어 책도 많았어요. 늘 책에 둘러싸여 살았지요. 그 책들을 6·25 전쟁 때 대부분 잃어버리고, 몇 권씩 챙겨온 게 서고에 가득합니다. 미술, 의학 등 여러 전문 서적들도 많습니다. 서고에 있는 책들이 대부분 한문책이어서 저 외에는 건드리지 않는데, 저만 보기에 아까운 책들이 많아요. 그 중에 성명학 관련 책을 한 권 번역해 곧 출간하려고 합니다.”


-어떤 책인가요.
“여순양(여동빈) 선생이 쓴 책이라고 합니다. 신선 같은 분인데, 역시 사람의 글 같지는 않아요. 이 책을 6·25 전쟁 때 고향집에 내려와 발견했어요. 이승만 대통령과 김 구 선생을 이 책 뜻풀이에 대입해 보니 그 분들의 삶과 일치해요. 뜻풀이가 두 줄에서 네 줄 내외로 간단하고 격조가 높습니다. 획수로 풀이하기 때문에 한글 이름도 대입해 볼 수 있고요.”


산정의 조부는 달성 서씨 문학절의 가문의 야은 서광용이고, 부친은 독립운동가 석련 서장환이다. 집안 영향으로 5, 6세에 한자를 거의 익혔다. 부친의 지우인 산강 변영만 선생은 어린 산정에게 “지난 수백년 문학 역사에서 자네 같은 사람을 보지 못했다. 문학을 하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그가 지은 한시만도 900수에 이른다.


-미술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죠.
“문학은 미술 같은 자유가 없어요. 문학은 문자를 떠나서는 성립이 안 돼. 문자는 사람이 만들어낸 쇠사슬입니다. 문자에 얽매서 노예 노릇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물론 미술도 법이 있지만 고서에 보면 법을 던지는 게 미술가의 길이라고 돼 있더군요. 그 법을 벗어나면 창작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림은 모든 게 작가에게 달려 있는 자유세계 입니다.”


-서울대 1회 입학생이시죠. 당시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해방되고 몹시 어수선한 때입니다. 해방 뒤에도 한동안 경성일보가 발행됐어요. 어느날 경성대학 기구 개편하며 예술대학, 법과대학, 의과대학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당시 고희동 선생 등이 종합대학 설립을 주도했던 것 같아요. 설립되면 꼭 들어가야지 마음먹고 시험을 봤지요. 개강도 안했는데, 국대안 파동 등이 일어나기도 했어요. 교수진도 제대로 안 갖춰져 몇몇 교수는 대우교수 자격으로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초대 학부장이 김용준 교수님이셨는데 이분은 동경대에서 미술학위를 받으신 분입니다. 미술사에 밝고 우리 미술에 대한 이해가 대단하셨던 분이세요. 우리 미술은 일본 미술과 다르다, 오원, 겸재, 추사, 단원의 전통을 이어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지요. 동경 미술학교에서도 전설적인 인물로 선생님의 학생 때 작품이 아직도 보관돼 있습니다. 1학년 때는 서양화, 동양화, 도안, 조소 등 모든 과 학생들이 자유롭게 공부하고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했습니다. 입학생이 몇 명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졸업생은 12명이었어요.”







-선생님 이름 앞에 ‘동양화의 현대화를 이끈 개척자’, ‘수묵 추상의 거장’이란 수식어가 붙습니다. 예술관을 들려주십시오.
“격조 높은 화가가 손에 붓을 잡으면 반드시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그리고 나는 나만의 화법이 있다는 생각을 되새겼다고 합니다. 아무리 어떤 화풍이 세상을 휩쓸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내 길이 있고 나만의 화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경천동지할 특출한 개성이 없으면 화가로서 살아남아야 할 의미가 없다는 뜻이지요. 창작의 세계는 어떠한 모방이나 답습은 설 자리가 없어요. 그것은 생명을 상실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지요. ‘나는 곧 우주이며 생명의 존엄이다. 나는 만유를 주무르고 새롭게 창조하는 화옹이 돼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내 몸은 춥고 굶주리고 나의 차림은 남루할지라도 나는 항상 황홀하고 즐겁기만 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을 많이 그리셨는데.
“화가도 인간이라 사람에 흥미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요. 인간 형상을 다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외톨박이가 있고 함께 울고 웃는 사람도 있고. 어머니가 아이를 품고 있는 모자상도 있습니다. 어머니의 탯줄을 자르고 나서는 혼자 돌아다니며 뿌리없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인간이지요. 어깨동무 하거나 서로 손잡고 춤추면서 환호하는 인간도 있습니다. 때로는 몸통은 사라지고 인간이라는 껍데기만 남긴 작품도 있고요. 희화적인 것도 있고 여러 소재가 다 등장합니다. 수많은 인류의 희로애락을 표현한 것입니다.”


-생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으시지요.
“내가 세상 구경을 하고 있는 것이 구십년이 됩니다. 뒤돌아보면 한순간에 지나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지만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고. 모두 다 서둘러 떠나버린 불귀의 객들입니다. ‘가는 사람은 붙잡지 않고 오는 사람은 거절하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일관하여 왔지요. 하, 계절은 춥기만 합니다. 나의 마음을 의논할 사람은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옛사람을 책 속에서나 작품 속에서 만나는 것으로 마음이 후련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그런대로 옛사람을 만나고 있다고도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옛사람들은 나를 만날 수가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면 서글프기만 합니다.”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엄동이 지나고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면 사람들은 기쁜 표정을 짓지요. 성난 듯 빗줄기가 내려치면 새들도 숲 속으로 숨어듭니다. 가슴을 열고 아늑하게 감싸면 찬 얼음도 녹습니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고 달려들면 그 험한 꼴에 누구나 기겁을 하고 돌아서지요. 이런 것은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생태의 하나입니다. 우주의 정기는 아름답고 아름다움은 선이요 사랑이며, 사랑의 정신은 태화(太和)가 아닙니까. 태화는 한계가 없고 일체를 품는 부드럽고 따스함을 뜻하는 것일 겁니다.” 


인터뷰를 마치자 서 동문은 책 ‘산정어록’을 가져오며 “여기에 내 예술관, 인생관이 나와 있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주옥같은 단상으로 가득하다. 간간이 적은 한시는 격조가 높다. 한 토막을 소개한다. 



顧我衰殘還自惜
나의 쇠잔함 뒤돌아보며 도리어 스스로를 아끼는 까닭은
廣陵散絶嗟無傳
광능산(廣陵散)이 끊어지려 하는데 슬프다 전할 사람 없네


*광능산은 거문고의 한 곡조. 진대(晉代) 혜숙야(?叔夜)의 고사(故事).




사진·글=김남주 기




서 동문의 자택 무송재 모습






서 동문은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며 화단에 등단했다. 1950년 모교 예술대학 미술부 제1회화과를 1회로 졸업했다. 1960년 묵림회를 창립하며 1961년 정부로부터 위촉받아 국전을 개혁하고 이어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 한국현대미술의 국제적 진출을 개척했다.

1955년부터 1995년까지 40여 년간 모교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다수의 특별전이 국내외 대표적인 미술관에서 개최됐다.
서 동문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우리 화단을 이끌어 온 한국 미술계의 거장이다. 현재까지도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며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