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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호 2015년 8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광복 70주년, 이준 열사의 한국혼을 되새기자

박성희 논설위원·언론정보연구소 선임연구원


광복 70주년, 이 준 열사의 한국혼을 되새기자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자 서울대학교 창학 120주년인 해다. 서울대의 창학 기준은 법과대학 전신인 법관양성소가 설립된 1895년이다. 뜻깊은 해를 맞아 곳곳에서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동시에 법관양성소 1기생으로 실천하는 지식인의 표상이었던 이 준(1859~1907) 열사의 애국충정을 기리는 행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서울대연극회 출신 동문들로 구성된 관악극회(대표 윤완석, 경제73-77)가 이 준 열사를 비롯한 헤이그 특사의 활약과 아픔을 다룬 연극 헤이그 1907’을 공연하고(815~96일 대학로 동양예술극장), 국립대구박물관에선 애국의 길, 국채보상운동특별전’(714~96)을 통해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이던 이 준 열사의 경제주권회복운동을 조명한다.

이 준 열사는 1888년 초시에 합격한 뒤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순국할 때까지 부정부패를 용납하지 않는 강직한 공직자이자 법조인, 교육자, 애국지사로 일관했다.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된 뒤 조신들의 비행을 파헤치다 곧바로 면직됐지만 좌절하거나 조정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기는커녕 독립협회 평의장으로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1899년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된 뒤 친일주구들의 활동이 노골화하자 대한보안회를 결성해 황무지개척권을 얻으려는 일제의 음모를 폭로했고, 송병준 등 친일분자들이 일진회를 통해 매국활동을 시작하자 윤하영 양한묵 등과 함께 공진회를 만들어 대항했다.


전 재산을 들여 보광학교를 설립하는 등 교육과 청년 계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안창호 김덕기 이동녕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 친일대신 5명을 성토하다 유배됐으나 석방되자마자 헌정연구회를 만들어 대한자강회로 발전시켰다. 1906년 평리원 검사로 임명됐으나 친일파 법무대신 이하영 등을 고소했다 파면된 뒤, 고종황제의 특사로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다. 을사늑약의 불법성 폭로와 대한제국의 주권 회복 호소를 위해 갔으나 일제의 방해로 끝내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못하자 현지에서 순국했다. 헤이그공동묘지에 묻혔던 유해는 196310월에야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은 광복 5년 만에 6·25전쟁이란 참담한 동족상잔을 겪고 잿더미 위에 조국을 재건했다. 196079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201428천달러로 354배 이상 급증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광복은 물론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의 성장은 조국이 내게 무엇을 해줬는지 묻기보다 내가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행동한 이 준 열사같은 이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서울대 법대 1, 나아가 서울대 1회 졸업생으로 이 준 열사가 지키고 실천한 법치와 정의,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참된 지도자의 모습은 일생동안 국가 사회의 기대와 성원 속에 살아가는 서울대인 모두의 귀감이자 푯대임에 틀림없다. 모교는 이 준 열사의 이같은 삶을 기려 2012425일 서암법학관(72) 앞에 동상을 세웠다.


이 준 열사는 땅이 크고 사람이 많은 나라가 큰 나라가 아니고, 땅이 작고 사람이 적어도 위대한 인물이 많은 나라가 위대한 나라가 되며, 위대한 인물은 반드시 조국을 위해 조국의 생명의 피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랑스러운 조국이지만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는 부정부패 척결, 빈부격차 해소, 법과 질서 회복 등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위대한 인물은 조국의 생명의 피가 돼야 한다는 이 준 열사의 말과한국혼을 가슴에 새기고 바르게 실천할 때 후손들에게 길이길이 빛나는 조국과 모교를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가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박성희 논설위원·언론정보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