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53호 2024년 4월] 뉴스 모교소식

동아리 탐방: 수어동아리 ‘손말사랑’ 

 
동아리 탐방
수어동아리 ‘손말사랑’ 
 
“농인 문화 핵심인 수어, 모두 외국어처럼 배웠으면”


손말사랑 부원들이 수어연극을 마치고 수어로 ‘I LOVE YOU’를 표현했다.


매년 1편씩 수어연극 상연
농인 기본권 보장 성명 발표도  


모교 수어동아리 ‘손말사랑’은 매년 가을 연극을 올린다. 지난해 11월 열린 수어연극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일반 연극에 수어통역을 제공한 정도가 아니었다. 톨스토이 원작을 수어로 번역해 대본을 만들고, 배우들은 오직 수어로 연기했다. 청인(청각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선 녹음된 대사를 수어에 맞춰 들려줬다. ‘수어제’란 이름의 이 공연은 예상보다 많은 100여 명의 관객이 들어 대성공을 거뒀다.

손말사랑 이택근(사회교육23입) 회장과 김태연(제약20입) 부원은 이메일 인터뷰에서 “수어란 언어의 특성을 알고 수어 사용자들의 독자적인 문화와 정체성인 ‘농문화’를 알아가는 게 동아리 활동의 핵심”이라고 했다. 올해 35주년이 된 장수 동아리로, 현재 28명이 활동하고 있다. 

동아리에선 매주 이 회장의 주도로 수어 스터디를 연다. 청인 입장에서 수어는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쉽지 않다. 영어와 한국어가 다르듯 한국수어는 한국어와 문법도 어휘체계도 다른 엄연히 별개의 언어. 김태연 부원은 “수어 대본을 만들려고 한국수어사전과 유튜브를 아무리 찾아도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한 경우가 많아 아쉬웠다”고 했다. 신체적 조건으로 한국어를 접하기 어려웠던 농인들이 그들이 사용하기 편한 체계로 수어 언어를 발달시켜 왔으니,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너 어제 뭐 먹었어?’ 같은 내용의문문을 수어로 표현하면 의문사인 ‘무엇’이 대부분 문장 마지막에 와요. 풀어쓰면 ‘너 어제 먹다 무엇’ 정도죠. 수어가 눈에 보이는 형태를 본떠 만들어진 단어가 많다 보니, 어미나 조사같이 문법적, 형식적인 의미만 갖는 표현은 발달하지 않았어요. 말투, 억양의 도움 없이 ‘의문’을 분명히 전달하기 위해 의문사를 맨 뒤에 배치하고요. 수어를 배울 때 수어 표현을 한국어 문법에 맞춰 사용하는 실수가 잦은데, 농문화와 수화언어에 대해 존중이 결여된 태도인 만큼 지양해야겠죠.” 

자막과 음성 캡션도 잘 나오는 요즘 ‘수어를 꼭 해야 하나’ 생각할 수 있다. 이 회장은 “메시지로 하는 대화와 목소리로 하는 대화가 다르듯, 몸짓을 사용하는 수어와 텍스트는 농인들에게 느낌이 다를 것”이라고 했다. “언어 체계도 다르니 어쩌면 청인들보다 더 큰 차이를 느끼지 않을까요? 언어엔 사용자의 정체성이 담겨 있어요. 자막과 캡션으로 ‘퉁칠’ 수 있는데 굳이 수어 통역을 사용하는 게 비효율적으로 보이겠지만, 수어를 쓰는 건 농인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수어의날이었던 2월 3일 대학수어동아리연합에 같이 소속된 숭실대·중앙대 수어동아리와 함께 농인의 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공동 성명서를 발표하고 여야 정당에 정책제안서도 전달했다. △농학교 교사의 한국수어 자격 의무화 △의료기관에 수어통역사와 문자통역사 배치 의무화 △초중등 교육과정에 한국수어 포함 등을 적극 요구했다. “코다(농인 부모의 청인 자녀)처럼 어릴 때 수어에 노출되지 않은 이상, 늦게 수어를 배워서 능숙하게 하긴 정말 어려워요. 수어 통역사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유죠. 병원이나 학교처럼 수어 구사자가 필요할 수 있는 곳에도 배치되지 않아 농인들은 제도적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입니다. 학교 교육과정에서 영어나 다른 외국어처럼 수어를 배우게 되면 장기적으로 농인들이 겪는 소통장벽이 낮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대부분 부원이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수어에 관심을 가지고 가입한다.  한 학기가 지나면 간단한 인사와 감정표현을 할 수 있게 되고, 방학 때 서울수어전문교육원에서 농인에게 직접 수어를 배우기도 한다. 틈틈이 청각장애인 관련 기관인 삼성소리샘복지관의 활동에 참여한다. 이 회장은 “요즘은 대부분의 청각장애들이 인공와우를 달고 음성언어로 생활하고 계셔서 수어로 소통할 기회가 그리 많진 않다”며 “실제로 보면 손이 너무 빠르고, 수어에 병행해 표정이나 다른 제스처로 물 흐르듯 사용하셔서 아는 것도 못 알아본다. 이론과 실전이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고 했다. 여느 언어처럼 안 쓰면 잊어버려 매년 기초인 지(指)문자와 지숫자부터 다시 배우기 일쑤지만, 수어로 인해 확장된 세계는 결코 좁아지지 않는다. 

“매 학기 끝에 결산 퀴즈를 하면 바디랭귀지인지 수어인지 모를 것들을 쓰게 돼요. 그러면서 시각으로 소통하는 언어인 수어의 무한한 표현 가능성을 느끼고, 소리 없는 세상에서 두 손과 눈으로 대안을 찾아가는 농인들의 삶과 농문화를 생각하게 되죠. 청각장애인을 더 세심하게 배려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안 나올 때 수어로 얘기할 수 있는 건 소소한 즐거움이다.  

팬데믹 동안 자주 만나지 못했어도 선배들의 내리사랑은 변함없다. ‘올해 홈커밍 기대하겠다’는 선배의 말에 요즘 이 회장의 어깨가 무겁다. “얼굴 모를 선배님들께서 동아리방에 간식보따리를 두고 가시고, 수어제를 보러 오셔서 뒤풀이 비용을 몰래 내주시기도 하셨어요. 사회에 나가서도 동아리를 잊지 않고 말없이 도와주셔서 큰 힘이 됩니다. 올해 꼭 만나뵐 자리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