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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호 2023년 8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JP의 미덕, 설렘과 호기심



JP의 미덕, 설렘과 호기심



전영기
정치80-84
시사저널 편집인
본지 논설위원


정치부 기자였던 필자에겐 “총재님”이라는 호칭이 익숙한 김종필(JP) 제11·31대 국무총리는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부의 1946년 입학 학번이다. 김종필 총재는 살아계실 때 필자에게 “영국 이튼 스쿨에 대한 동경이 나를 사범대로 이끌었어.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한 웰링턴 장군이 ‘난 이튼 정신을 갖고 싸웠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얻어진 것’이라고 했지. 나도 이튼 스쿨 같은 학교를 만들어 해방 조국을 이끌어갈 후진을 키워보자는 꿈을 가졌어요”라고 말했다(<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 2016년, 중앙일보).

김종필은 부친의 죽음으로 가세가 기울면서 1948년 6월,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학업을 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JP의 서울대 학부 재학기간은 1946년 3월부터 1948년 6월까지 2년 3개월인 셈이다. 그에게 ‘서울대 동문’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주한 미국대사관에서 정치자문역으로 근무했던 그레고리 헨더슨 같은 사람들은 서울대 시절 김종필이 ‘국대안(國大案) 파동’에서 좌익 편에 섰다는 주장을 했으나 이는 낭설이다. JP는 대학 때 자신이 국대안에 찬성 입장이었다는 점을 선명한 기억과 함께 필자에게 상세하게 얘기해 줬다. 헨더슨씨는 1961년 5·16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이를 제압하기 위해 미국이 한국에 원조를 끊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는데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이 1963년 2월 버거 미국 대사와의 담판 끝에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원조 선박의 밀가루가 한국 땅에 풀리게 되었다. 김종필의 결기가 헨더슨의 정치적 입장을 무력화시키고 결국 헨더슨씨는 귀국 조치되었다. 두 사람 간 갈등과 앙금이 상당했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추정이다. 그건 그렇고 JP는 결국 1949년 1월, 육사 8기 시험에 합격함으로써 교사에서 군인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제 요즘 얘기를 해보자. 전쟁,혁명,정치의 온갖 풍상을 겪고 JP가 92세로 유명을 달리한 게 2018년 6월 23일이었다. 매년 충남 부여 고향 묘소에서 조촐하게 치러지던 그의 추도식은 올해 6월 23일 5주기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서울, 그것도 국회에서 많은 사람들의 참석 속에 엄수되었다. 2018년과 2023년의 정치적 환경 차이 덕분일 터인데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느낄 수 있었다. 김종필 총재에 대한 정치적 평가는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김 총재의 인간미와 유머, 극단적이지 않은 중용의 미덕에 대해선 크게 의견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JP의 미덕에 설렘과 호기심을 추가하고 싶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나폴레옹의 유언인 “아, 유성(流星)…군대…조세핀”을 되뇌며 낭만적인 표정을 지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