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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호 2022년 12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관심의 지평을 넓혀야 할 때



관심의 지평을 넓혀야 할 때


박종성
서양사82-86
경향신문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한국 축구가 월드컵에서 16강에 올랐다. 많은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브라질을 상대로 세계적인 수준의 벽을 절감했다. 월드컵 경기가 열릴 때 국민들은 밤잠을 설쳐가며 응원대열에 합류한다. 한국 축구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실력보다 훨씬 높다. 기대와 현실 사이 차이를 줄이는 방법은 없을까. 한 국가대표 선수의 인터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는 “국민들이 월드컵 시즌뿐 아니라 평소에도 축구에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했다. 이벤트가 있을 때만 보이는 ‘간헐적 관심’이 아닌 지속적인 관심을 요구한 것이다.

관심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잡초를 화초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든다. 시인 고은은 ‘그 꽃’이라는 짧은 시를 썼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산을 올라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등산할 때와 하산할 때의 마음가짐이 다름을. 정상을 향할 때는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나 산을 내려올 때는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지나쳤던 꽃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듯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본능적인 관심은 나에 관한 것이다. 자기애의 심화, 과잉을 나르시시즘이라고 한다. 요즘 흔히 말하는 ‘관종’은 나르시시즘의 파생 현상이다. 병적으로 남들의 관심끌기에 집착한다. 그 모습을 시시때때로 전달되는 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 접할 수 있다. 자신의 시시콜콜한 신변잡기를 자랑삼아 공개한다. 댓글에 일희일비하는 모습을 보면 삶의 주인이 자신인지 남의 시선인지 혼동된다.

관심대상이 나와 내 주변에 머물면 협소한 사고의 틀에 갇힌다. 관심의 지평을 협량의 차원을 넘어서 이웃과 사회로 넓혀야 한다. 편협, 옹졸이라는 담장을 허물어 관심의 대상을 확장해야 한다. 관심 대상의 확대는 세계관의 확장이다. 다수가 확장된 관심사를 추구해야 사회는 변화하고 발전한다. 여기에 지속성이 더해져야 한다. 불길처럼 순간 타올랐다 사라지는 관심은 사막에 한 차례 퍼붓는 소나기와 같다. 소나기는 한순간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나 뿌리를 내리게 하거나 꽃을 피울 수 없다.

모교에 대한 관심도 다르지 않다. 동문들이 입학할 때 품었던 애정은 졸업과 동시에 사라지는 것 같다. 간헐적 관심보다 더 심각한 건 ‘관심 절벽’이다. 캠퍼스를 떠났다고 관심마저 끊는 것이다. 관심이 사라진 곳에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