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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호 2022년 11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책 안 읽고 선진국 된 나라 없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한경BP 대표·본지 논설위원
관악춘추
 
책 안 읽고 선진국 된 나라 없다


오형규
국문82-89
한국경제신문 한경BP 대표·본지 논설위원


흔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요즘은 틀린 말 같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이란 말이 있을 만큼 책 읽기 좋은 계절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을엔 여행, 산책, 등산, 골프, 모임 등 뭘 해도 더할 나위 없다. 선선한 날씨, 쾌적한 습도, 따사로운 햇살, 만산홍엽의 아름다운 풍경에 가만 앉아 있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가을이 돼도 ‘독서의 계절’이란 말조차 잘 안 들린다. 그 흔했던 기업 독서경영도 시들해졌다. 대신 유튜브, 넷플릭스 등 볼거리가 넘쳐나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코로나로 억눌린 일상이 풀리자 다들 어디로든 떠날 궁리만 한다. 

그 결과가 ‘독서율 47.5%’(2021년)라는 충격적인 숫자다. 독서율은 1년간 한 권이라도 읽은 성인의 비율이다. 한 달이 아니라 1년간! 성인의 둘 중 하나는 1년 내내 책 한 권 안 읽었다는 얘기다. 2000년대 70%대, 2010년대 60%대였던 독서율이 최근 몇 년 새 출산율처럼 급전직하다. 1인당 연간 독서량은 2019년 6.1권이던 것이 작년엔 2.7권으로 반토막도 안 된다. 

신문기자에서 출판회사로 옮겨와 보니 한국 사회의 독서기피 현상이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 ‘언제 어디서든’ 유비쿼터스 시대여서인지 출판업은 사시사철 365일 불황이다. 

모든 세대가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한다. 청년들은 취업난에 그렇다지만, 지도층 인사들은 골프와 술로 바쁘고, 지식인들조차 화제가 책보다 OTT 인기드라마다. 바빠서 책을 못 읽는다는 사람은 한가해도 책을 안 읽는다.

혹자는 구텐베르크 이래 ‘600년 활자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책이 주던 효용을 영상이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IT미래학자 니콜라스 카의 지적처럼 “독서에 집중하는 행위가 어느새 투쟁이 되어버렸다”(‘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정보의 시대 도래는 실상 세상에 대해 그 누구보다 모르면서, 이전의 어떤 누구보다도 더 많이 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세대의 등장을 가져왔다”는 그의 주장을 부인하기 힘들다. 

경제규모 세계 10위권, 1인당 소득 3만5000달러인 한국은 물질적으론 이미 선진국이다. 여기에 기생충, BTS, 임윤찬 등이 속속 나오며 문화강국이라는 ‘국뽕’까지 커지고 있다. 그럴수록 우리 사회는 정신의 허기가 커져간다. 정치판의 저열한 갈등도, 사회 전체가 숙려와 성찰보다는 둥둥 떠다니는 듯한 부박함도 마찬가지다. 10대 때만 죽어라 공부하고 성인이 되어선 학습을 멈춘다. 책을 안 읽으면서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