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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호 2021년 11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한자에 관한 불편한 진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본지 논설위원
 
 
한자에 관한 불편한 진실



오형규 
국문82-89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본지 논설위원
 
 
“홀홀단신으로 이억만리로 떠나지만 환골탈퇴 하고 돌아와 동거동락 할 수 있기 바란다.”

인터넷에 차고 넘치는 사자성어 오류를 조합한 것이다. 틀린 줄 모르고, 틀렸다고 지적하면 당장 ‘꼰대’라고 반발한다. ‘황당무괴’, ‘명예회손’, ‘공항장애’, ‘야밤도주’, ‘사면초과’ 등도 심심치 않다. ‘인간증명서’, ‘바람물질’에 이르면 대략난감이다. 교과서는 물론 공문서나 신문, 논문 등에서 한자가 거의 사라지면서 빚어진 촌극이다. 설상가상 촌극(寸劇)을 ‘시골(村) 해프닝’ 정도로 아는 이들도 허다하다. 

한자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지 반세기가 흘러 이제는 학생은 물론 교사 중에도 한자맹(盲)이 적지 않다. 글과 말로 먹고사는 언론계도 예외가 아니다. 얼마 전 한 방송기자가 ‘무운을 빈다’는 말을 ‘운이 없기(無運)를 빈다’로 오해한 사례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자 명함을 받으면 뒷면 영문 표기를 보고서야 상대방 이름을 아는 판이다.

해방 직후 77%에 달했던 문맹률이 지금은 1% 미만이다. 세종대왕 덕에 글 읽는 데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읽고 나서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는 문해력은 되레 퇴보하는 듯하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한자 교육 실종도 빼놓을 수 없다.

혹자는 “우수한 한글로 다 표기할 수 있는데 고리타분한 한자를 배워야 하느냐!”고 반박한다. 졸업요건에 한자인증이 있는 고려대, 중앙대에선 학생들의 폐지 요구가 끊이지 않는다. 실제로 올해 초 중앙대 학생회 주관 설문조사에서 한자인증 폐지 찬성이 90%에 달했다. 

하지만 우리말은 개념어의 7할이 한자어다. 동음이의어는 85%에 이른다. ‘의사’만 해도 표준국어대사전에 ‘意思, 醫師, 義士, 疑似’ 등 14가지가 나온다. 표음문자인 한글이 소리를 기록하는데 탁월하지만, 의미 전달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한자를 남의 나라 문자가 아니라 한글과 함께 ‘국자(國字)’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도 한자 홀대는 점점 심해진다. 수능에서 한문은 제2외국어 선택과목으로, 선택 수험생이 점점 줄어 2022학년도엔 1000명 남짓 수준이다. 영어권 나라들이 사어(死語)인 라틴어를 가르치는 것은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자를 계속 외면한다면 근대 이전 한자로 기록된 우리 역사와 문화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이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할 때다. 한자 실력이 곧 국어 실력인데 이렇게 외면해도 될까. 한자를 모르니 역사 수학 과학 등 모든 과목이 재미없는 암기과목이 되고 만다. 

10여 년 전 ‘서울대생의 한자 실력이 100점 만점에 45점’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영어에 쏟는 노력의 1%만 한자에 할애해도 이 지경은 아닐 것이다. 1800자 정도만 가르쳐도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