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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호 2021년 3월] 문화 신간안내

화제의 책: 재벌 회장 아닌 ‘인간 박용만’이 쓴 글,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

박용만 두산인프라코어회장 지음


“재벌 회장 아닌 ‘인간 박용만’이 쓴 글”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




박용만 (경영73-78)

두산인프라코어 회장
마음산책



유튜브에서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 중인 한 국내 재벌 회장의 영상. 아침 출근부터 저녁까지 회장의 일상에 동행한 방송사 다큐멘터리다. 몇 년이 지났는데도 ‘멋있다’, ‘생각보다 검소하다’ 등 연예인 영상 못지않게 댓글이 올라온다.

그 회장이 직접 운영하는 SNS. 다큐멘터리에서 마신 커피가 ‘믹스 커피’인지 묻는 누군가의 질문에 답이 달렸다. “ㅎㅎ 믹스 커피 아닙니다”. 해외 출장길에 올린 소감은 이렇다. “가는 데마다 코 떨어지게 춥다. 뜨끈하고 얼큰한 찌개에 소주나 한 잔 했음 딱 좋겠다”.

소탈하고 군더더기 없는 언행에 재계 ‘소통왕’으로 불리는 이 사람, 박용만(경영73-78·본회 상임부회장)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이 첫 책을 냈다. 산문집 ‘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 “자서전은 아니고 늘 그랬듯이 내 생각을 글로 옮겨 즐기자는 생각에 써 내려간 책”이다. SNS에 즐겨 쓰는 단상으로 글 근육을 인정받은 그다.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썼다’는 말이 믿길 만큼 솔직하고, 유쾌하다. 경영자와 아버지, 나이듦에 적응해가는 중년 남성이 갈피마다 머무른다.

책은 대기업 오너가 집에선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멸치 똥을 딴다는, 다소 충격적인 고백을 동반한 개인사로 운을 뗀다. 첫사랑 아내 이야기, 아버지 고 박두병(경성고상32졸·초대 총동창회장) 두산그룹 초대 회장과 박용성(경제59-65) 전 두산중공업 회장, 박용현(의학62-68) 연강재단 이사장 등 형제간 일화도 살짝 공개했다. 벌독 알레르기가 있는 줄도 모르고 벌에 물렸을 때, 넷째 형(박용현 동문) 덕에 목숨을 건졌다고 돌아봤다.

청량음료 영업부에서 시작해 기업 최고경영자와 대한상의 회장에 오르기까지 경영인 박용만의 이야기는 담백하게 풀었다. 밥캣 인수 당시의 비화와 지루한 협상에서 승기를 쥔 대목이 흥미진진하다. 기업과 동료의 명운을 짊어진 리더의 무게를 진중하게 토로하는 한편 체면 구긴 이야기도 거침이 없다. 지갑도 없이 임원들과 냉면 회식 후, ‘두산그룹 회장’으로 직접 외상을 달고 나와 지나가던 사원에게 융통해 갚은 일화는 유명하다.

책 제목의 ‘그늘’은 무엇을 뜻할까. 아버지의 임종을 앞두고 이복 형들이 사는 집에 처음 발걸음하던 열여덟 살의 기억일수도 있고, 여기저기 잔고장 많은 몸일 수도 있겠다. 젊은 사원들과 시시콜콜한 메일을 주고받으며 아버지같은 회장님으로 불렸던 이면엔 2015년 신입사원 희망퇴직 논란으로 죽을 듯 힘들었던 시간이 있다. “어린 사원들은 건드리지 말라”던 그의 당부와 다른 경영진의 결정이었지만 “어차피 나는 분노조차 표현할 수 없는 위치”라며 마음을 삭였다.

취미와 관심사를 내비친 대목에선 곧 맞이할 ‘자유인’의 삶을 어림짐작하게 된다. 2월 말 8년 가까이 맡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서 퇴임했다. 가을엔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직을 내려놓는다. 한때 “매그넘까진 아니어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이따금 송고하는” 사진기자를 꿈꿨고, 틈나면 카메라를 쥔다. 최근 흑백 사진만 찍어 올리는 인스타그램 계정(@yongmaan park)을 만들었다. 젊은이들과 도시락을 만들어 독거노인에게 배달하는 봉사도 열심이다. 책 인세는 그 식재료 구입에 충당할 계획이다.

1,000부 한정으로 책에 친필 사인을 넣었다. 기자가 발행일에 온라인 서점에서 산 책을 펼쳤을 때, 처음엔 복권에 당첨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거침없는 필체로 적힌 메시지. “천 번째 사인본입니다. 그냥 책 한 권이지만 내 마음속에선 천 마리 학을 접고 접어서 담아 보내는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제 책을 읽어 주셔서 진심으로 찐하게 감사드려요. 건강하세요, 님의 마음에 내려앉은 학을 위해, 그리고 님을 위해 기도할게요. 박용만 드림”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