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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2021년 1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세종이 없었다면 장영실도 없었다

성기홍 연합뉴스TV 보도국장·본지 논설위원


세종이 없었다면 장영실도 없었다



성기홍
사회86-90
연합뉴스TV 보도국장·본지 논설위원




장영실은 자격루를 최초로 만든 과학자다. 과학적 재능이 탁월했다. 그를 조선시대 최고 과학자로 만든 것은 천재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분제 시대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었고, 사대주의 시대 조선의 하늘과 시간은 중국을 따라야 했다. 신분을 뛰어넘는 세종의 파격적 용인술, 조선의 시간을 갖겠다는 세종의 혁명적 의지, 관료적 타성을 깨는 세종의 창발성이 없었다면 자격루(물시계), 앙부일구(해시계), 간의대(천문대) 같은 장영실의 과학적 성취는 없었다.

지난해 말 국내에 코로나19 백신 논쟁이 일었다. 영국 등에서 백신 접종이 시작되자 ‘백신 우선수급’을 주장하는 목소리와 ‘백신 만능주의’를 경계하는 견해가 충돌했다. “우리나라엔 백신과 치료제가 도대체 언제 개발되느냐”는 불만과 질타도 일었다. 백신은 과학인 만큼 “정치가는 빠지라”는 목소리도 커졌다. 방역 대처를 놓고 왜 과학자, 전문가들에 귀 기울이지 않느냐는 힐난도 이어졌다.

코로나19 사태를 종식하기 위해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급선무이지만, 의학·과학의 영역에서만 다뤄질 문제는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등 영역에서 고려할 사안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문제다. 백신의 연구 개발은 ‘실험실 안’(과학)에서 이뤄지지만, 백신의 승인과 도입, 배분, 접종까지 과정은 ‘실험실 밖’(정치)의 영역이다. ‘실험실 밖’의 장애물이 정돈되지 않으면 ‘실험실 안’의 성취도 어렵다.

백신 개발은 과학자들의 몫이긴 하나, 백신의 효험이 입증되지 않은 상태에서 임상시험을 누구에게 할 것이냐, 임상 대상자를 어떻게 구하느냐는 문제를 푸는 것은 정치 또는 행정의 영역이다. 국내 코로나19 치료제 연구업체는 개발에 필요한 임상 대상자를 구하는 데 애로를 호소했다. 정부는 임상시험 참여 캠페인을 벌이지만 참여자는 저조하다. ‘실험실 밖’ 여건이 형성되지 않으면 과학은 전진하기 힘들다.

백신 개발은 미국이 가장 빠른 속도로 내달렸지만, 정작 화이자 백신의 승인은 미국이 아니라 영국이 빨랐다. 왜 영국이 빨랐을까? 영국 의약품건강관리제품규제청(MHRA)과 미국 식품의약국(FDA) 심사 테이블에 오른 백신은 다르지 않았지만, 양국의 검토 절차는 달랐다. 미국이 더 까다로웠다. 백신 접종이 지연될 경우 초래될 희생과 백신을 성급하게 접종했다 잘못될 경우 초래될 희생을 둘러싼 셈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1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백신 개발을 성공시키는 데 기여한 미 행정부의 태스크포스 팀장은 통상적이지 않은 방식의 계약에 100억 달러 이상을 쓸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백신 개발의 성공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6개 제약사와 선구매계약을 했는데, 제약사들이 백신 개발에 실패하더라도 구매대금을 되돌려줄 의무가 없는 조건이었다. ‘혈세 낭비’ 문책으로 징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한국 공무원은 엄두를 내기 힘든 결정이다.

“우리는 백신 도입을 왜 빨리 못했느냐”, “백신 승인을 왜 빨리 하지 않느냐”, “당국의 판단과 결단이 너무 느린 것 아닌가” 응당 따져야 할 문제다. 다만 겉에 드러난 결과만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건 소모적 논쟁이다. 백신 개발과 도입이라는 과학에 기대를 거는 만큼, 그 울타리 너머의 정치도 함께 살펴야 한다. 세종이 없었다면 장영실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