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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호 2020년 5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정성희 본지 논설위원 칼럼

내 곁에 있는 죽음
느티나무 칼럼

내 곁에 있는 죽음

정성희
국사82-86
전 동아일보 미디어연구소장
본지 논설위원


호모 사피엔스는 언제 멸종할까. 뭔 황당한 소리냐고 할 수 있겠지만 거시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이다. 생물학자들은 지구에서 페름기와 백악기를 포함해 다섯 번의 대멸종이 있었으며 현재는 여섯 번째 대멸종 단계라고 말한다. 공상과학소설이나 영화가 그리듯 종말은 외계인 침공이나 인공지능(AI)의 반란으로 오지 않는다.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시나리오는 핵전쟁과 바이러스의 습격인데 바이러스의 공격을 먼저 맞았다. 

천연두, 페스트, 콜레라 등 전염병의 역사가 보여주듯 코로나19로 인해 인류가 멸망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고 언제나 그렇듯 인간은 해답을 찾을 것이다. 그러나 BC가 ‘비포 코로나(Before Corona)’라는 말에서 보듯 코로나 이후의 세상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모습을 띠고 그 종착점이 어디일지 모르기에 두려운 것이다. 기업의 줄도산, 대량실업, 증오의 확산이 예상되고 돈 풀기, 감시강화가 가져올 전체주의의 득세도 걱정스럽다. 

그런데 생각을 바꿔볼 만한 일도 일어나고 있다. 한 제약회사 임원은 코로나로 실적향상을 기대했는데 약품이 팔리지 않아 고민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손 씻기와 마스크 쓰기 등 개인위생을 철저히 지킨 덕분에 약을 안 사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사망률도 떨어졌다. 노인들이 외출을 자제하고 스스로 건강을 챙긴 덕에 장례식장이 남아돈다. 많은 동네병원이 휴업에 들어갔다. 사회적 격리로 외출을 삼간 탓도 있겠지만 아픈 사람이 줄어서다. 코로나 블루를 예외로 두면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건강하다.

코로나19가 흔들어 놓은 일상
평범한 삶은 얼마나 소중한가

개인 차원뿐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코로나는 나라의 역량과 국민의 의식수준을 드러내 주었다. 덩치만 큰 허약한 나라, 국민의 생명보다 체면이 중요한 나라, 대책 없이 낙천적인 나라… 평소 가려졌던 한 국가의 민낯, 그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이 드러났다. 태풍을 만나야 선장의 진짜 실력을 알 수 있다고, 큰소리만 치던 지도자들의 참모습도 드러났다. 코로나 초기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감염자가 많아 148개국으로부터 입국금지를 당했던 한국이 치밀한 감염자 관리, 우수한 진단수준, 헌신적 의료진,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세계의 찬사를 받고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킹덤’을 본 외국의 한 시청자가 남긴 댓글이 인상적이다. “한국인은 옛날부터 바이러스랑 잘 싸운 사람들이었다.”

인간은 평소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코로나는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삶이 한순간 무너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얼마 전 바라캇 컨템프러리에서 관람한 전시회 제목이 ‘여기에도 나는 있다(Even here, I exist)’였다. ‘여기’란 양과 염소를 치며 목가적 삶을 이상향으로 여기던 그리스의 유토피아 ‘아카디아’를 말한다. 유토피아에도 죽음은 존재한다는 뜻이지만 완벽한 이상향은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는 의미가 더 적절해 보인다. 죽음을 의식하는 순간 삶이 충만해진다는 사실을 가르쳐준 게 코로나다. 학교에 가고, 친구를 만나고, 영화를 보러 가는 일상은 얼마나 값진 것이었나. 

‘사람들은 광장마다 모여 춤을 추었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영혼의 불빛을 낮게 줄여놓고 살아온 지난 몇 달 동안 비축됐던 생명감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의 결말처럼 역병을 물리치고 환희를 분출하는 날이 빨리 와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처럼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