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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2호 2021년 9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적수를 적대하는 정치  

김정곤 한국일보 논설위원


적수를 적대하는 정치  



김정곤
사회87-94
한국일보 논설위원·본지 논설위원

 
진보·보수 갈려 비방 말고
서로를 애국자로 인정해야
 
“문재인 정부가 다른 건 몰라도 야당복은 타고 났다.” 이번 정부 들어 보수 야당이 지리멸렬하자 정치권에서 한창 회자됐던 말이다. 집권여당은 야당의 무기력을 동력 삼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탈원전 등 논란이 다분한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여당의 과속을 의심하는 여론도 없지 않았으나 민주당은 지난 총선에서 180석의 절대의석을 차지하면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고 있다. 의석 분포를 보면 21대 국회가 끝날 때까지 야당은 여당의 적수가 못 될 것 같다.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에는 적수들이 적지 않았다.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로 대표되는 3김 정치가 그랬다. 특히 두 전직 대통령은 정치적 성공을 위해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견제하면서도 독재에 항거할 때는 동지였다. 정치 스타일이나 성격은 크게 달랐지만 서로를 인정하며 역사발전에 기여했다. 만약 DJ가 YS를 적수(rival)가 아닌 적(enemy)으로 간주했다면 훗날 3000억원 규모로 알려진 대선 비자금으로 옭아매 정치 생명을 끊지 않았을까 상상해 본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한국 정치는 적수가 아닌 적대의 정치로 변하고 말았다. 진보와 보수로 갈라진 정치판은 화해할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있다. 그런 적대의 정치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비극적 최후를 맞았고, 적폐청산 대상에 오른 두 전직 대통령이 투옥되는 잔혹사가 이어졌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야당의 유력 주자가 ‘독재와 전제를 가장한 민주주의’를 성토하며 정권교체를 외치는 장면을 보노라면, 적대 정치의 악순환이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앞선다.

적대정치의 유산은 집권을 위해 어떤 수단도 불사하겠다는 왜곡된 인식으로 우리 정치판에 남아 있다. 상대방에게 빨갱이라는 이적(利敵) 낙인을 찍고 범죄자나 독재자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일이 심심치 않다. 상대방의 생각과 노선은 잘못됐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위험하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는 극단적 인식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폭주들이다.

적대정치의 끝은 상상하기조차 싫다.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필리핀의 마르코스, 칠레의 피노체트 등 동서고금 독재자들이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국가의 위협 세력으로 낙인찍었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물론 기어코 사회질서까지 붕괴시키고 말았다. ‘적대정치는 민주주의의 적’이라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적대정치로부터 민주주의를 구해 낼 수 있을까. 헌법과 법률 등 제도적 장치로는 불가능하다는 게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결론이다. 두 교수는 공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경쟁자가 올바르고, 국가를 사랑하고, 법을 존중하는 시민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의 생각이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해도 그들을 위협적인 존재로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과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들의 집단 의지, 상호관용(mutual toleration)이 민주주의를 지키는 규범이라는 것이다. 캐나다 자유당 총수를 역임한 마이클 이그나티예프의 주문도 다르지 않다. “정치민주주의에서 반드시 필요한 야당과 적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것을 혼동하면 이데올로기 싸움으로 갈 수밖에 없다.” 10년 전쯤 방한 강연회에서 “적과 적수를 구별해야 한다”면서 강조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