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07호 2020년 6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입학 50주년, 그리고 VERITAS LUX MEA

김도연 울산대 이사장 칼럼
명사칼럼
 
입학 50주년, 그리고 VERITAS LUX MEA



김도연
재료공학70-74
울산공업학원 이사장
모교 명예교수
 
 
지난 5월 중순, 총동창회로부터 받은 편지 한 장은 조금 뜻밖이었다. ‘입학 5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라는 제목이었다. 총동창회에서 필자와 같은 1970년 입학생 모두에게 보낸 소식일 것인데, 그간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준 데 대한 보답으로 모교의 배지(Badge)를 신청하면 보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스스로가 총동창회를 위해 한 일이 무엇인가 되돌아보는 계기도 되었다. ‘서울대학교’란 이름 덕분에 누린 것이 더 많은 삶이었으니 오히려 필자가 동창회와 대학에 감사할 일이다. 여하튼 반세기, 50년이 그렇게 흘렀다. 1인당 연 소득이 250달러였던 1970년에 비하면, 지표상으로는 현재 100배 이상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 입학했을 때, 학교만이 아니라 거리 여기저기 붙어 있던 ‘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 달성으로 희망의 70년대를 이룩하자’는 표어가 생각난다. 소득 1,000달러를 달성한 것은 1978년이었다.

당시의 대학생들에게 배지는 필수품이었다. 전체 고등학교 졸업생의 10%만이 대학에 진학하던 시절이었으니, 대학생이란 신분이 갖는 무게가 지금과는 달랐다. 게다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서울대학교라는 가치가 함께 했으니 스스로를 자랑하고픈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버스 탈 때 배지를 달고 있어야 대학생으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이를 필수품으로 여기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다. 어쨌건 배지만 있으면 어디서나 대학생으로 인정해 주던 때니 가짜 노릇하기도 쉬웠을 것이다. 가짜 학생의 결혼 주례까지 서 주었다는 교수 이야기도 있었다.

총동창회 편지에서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던 배지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월계관을 가로지르는 펜과 횃불, 그리고 가운데 놓인 책자의 왼쪽 페이지에 쓰인 VERITAS 그리고 오른쪽 페이지의 LUX MEA가 반가웠다. 그런데 사실 이 배지를 처음 받았을 때인 50년 전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생경한 것은 우리 문화 및 전통과 전혀 무관한 라틴어다. 이 글을 책자의 위에서부터 아래 순서로, 즉 VERI LUX TAS MEA로 읽는 것이 맞다는 동료들도 많았다. VERITAS LUX MEA가 ‘진리는 나의 빛’이란 설명은 언제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기억에 없다.

경성제국대학의 틀을 벗고 1946년 미군정 시절에 서울대학교가 개교하면서 만든 배지로 짐작되는데, 그렇다면 VERITAS LUX MEA는 당시 일했던 미국인 해리 앤스테드 초대 총장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다. 여하튼 학교 배지에서 라틴어를 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영미계 대학의 경우다. 독일도 프랑스도 그리고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대학 배지나 문장에 라틴어의 관행은 없다. 대만국립대학은 서울대학교와 비슷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일제하의 대만제국대학 시절을 모두 포함해 스스로의 역사를 1928년에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대학 배지에는 애국애인(愛國愛人) 그리고 돈품려학(敦品勵學)의 여덟 글자가 쓰여 있다. 

라틴어는 서양서도 낯선 고어 모교문장엔 우리 전통 담기를
VERITAS는 1636년 개교한 하버드 대학의 문장(紋章)에 새겨진 글이다. 아마도 초대 총장께서는 서울대가 하버드 같은 명문으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미국에는 하버드 외에도 대학 문장에 라틴어를 쓰는 대학이 많다. MIT를 상징하는 문장에는 책을 읽고 있는 학인(學人)과 망치를 들고 서 있는 장인(匠人)이 함께 하고 있다. 교육목표가 두뇌로 지식가치를 만드는 과학자와 손으로 경제가치를 만드는 기술자 육성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MENS ET MANUS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머리와 손’을 의미하는 라틴어다. 실제로 지식을 만드는 과학자는 국격(國格)을 높이지만 상품을 만드는 기술자는 국부(國富)를 쌓는다. 

그런데 이제 라틴어는 대부분의 서양인들도 읽는 순서조차 모르는 고어(古語)가 된 듯싶다. 인터넷에는 프린스턴대학에 대한 질문이 올라 있는데, 대학 문장에 적혀 있는 VET TES EN NOV TAM TUM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이 흥미로운데, 그렇게 윗줄에서 아랫줄로 읽는 것이 아니라 왼쪽 페이지에서 오른쪽으로 VET NOV TES TAM EN TUM으로 읽는 것이 맞으며 이는 ‘신구약 성경’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VERI와 TAS가 아니고 VERITAS인 것처럼 TESTAMENTUM이 한 단어라는 설명도 함께 있다.

대학의 보수성은 지켜야 할 가치지만 이제 라틴어는 이렇게 잊혀진 언어가 되었고 일반인에게는 고전(古典)으로서의 의미도 사라진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문장은 조금 신선했다. 이 대학의 모토는 역시 라틴어로 FIAT LUX인데, 이에도 불구하고 대학 문장에는 이를 영어로 해석한 LET THERE BE LIGHT로 적혀 있다. 여하튼 미국 대학들의 문장에는 대부분 그들 사회의 종교적 전통이 드러나 있으며, 그런 이유로 라틴어가 많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VERITAS도 신약 성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에서 비롯된 것이다. LUX MEA도 마찬가지다. 

총동창회에서 보내준 반가운 소식 속의 배지를 접하면서, 이제 서울대학교는 배지 속의 VERITAS LUX MEA를 다른 말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한글로 ‘진리는 나의 빛’이라 써도 좋겠다. 아니면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살리면서 서울대학교가 진정으로 지향하는 목표를 나타내는 새로운 문구(文句)면 더욱 좋을 것이다. 동창들을 비롯한 대학구성원 모두가 고민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