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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호 2023년 6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국익 앞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이강덕 정치82-88  한미클럽 회장  본지 논설위원
관악논단
 
국익 앞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이강덕
정치82-88 
한미클럽 회장 
본지 논설위원


중국과 소련은 1969년 국경 분쟁을 벌였다. 동부 국경지대 우수리강의 전바오섬(소련명 다만스키)의 영유권을 놓고 싸워 서로 100명 가까운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까닭에 그 하류에 있는 소련의 무역항 블라디보스토크는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들어서기까지 중국인들의 접근이 어려웠고 지금까지도 비교적 제한적이었다.

최근 중국 언론들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가 중국의 경유 항구로 등재됐다’고 보도했다. 중국 동북지역의 상품들이 쉽게 해외운송에 나설 길이 열려 시간과 비용이 크게 절약되게 됐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가 원래 중국 땅(중국명 해삼위)이었다가 1860년 베이징조약에 따라 러시아에 빼앗겼었다는 점을 들어 ‘러시아의 곤궁한 처지가 드러났다’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구소련이 해체되고 중국의 무역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이미 중국 화물선들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이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이번 조치는 중러관계가 중국 주도로 전개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임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고전하고 있는 러시아는 중국에 거듭 SOS를 치고 있고 중국은 이를 십분 활용하고 있다. 지난해 9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를 순방했던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올해 5월에는 중국·중앙아시아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중앙아시아 5개국(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에 대해 5조원 가까운 유무상 원조 계획을 밝혔다. 융자 지원도 있고 무상 원조도 있다. 과거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러시아의 역할을 중국이 하고 있는 셈이다. 

유럽과 러시아의 관계도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크게 변했다. 러시아의 외교적 고립은 지난 몇 년 사이 격세지감의 수준으로 심각해졌다. 가스 등 에너지를 러시아에 의존하던 독일 등 유럽 주요국들은 주요 수입선을 다른 국가로 돌렸다. 외교, 경제 관계의 단절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들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놓고 사실상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나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빈번하게 왕래하고 러시아의 값싼 에너지원을 칭찬하던 불과 2, 3년 전의 모습과도 크게 다른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다방면에 걸친 갈등이 계속되면서 서방국가들과 중국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물론 그 변화의 근저에는 각자의 국익에 대한 계산이 깔려 있다. 한때 유럽 국가 중에 중국의 경제력을 앞장서 평가했던 이탈리아는 가장 먼저 탈중국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집권한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는 과거 정권이 참여를 공식선언했던 중국의 일대일로에서 이탈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의 전통적인 우방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중국과의 관계를 미국의 지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특히 마크롱 대통령 같은 경우 ‘대만 문제에도 중립’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 5월 중순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결과는 예상보다는 대중국 견제조치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G7을 미국이 주도해왔고 그 충실한 우방국인 일본이 주최하는 회의였지만 경제 관련 노골적인 봉쇄방안들은 구체화되지 않았다. 중국의 비시장적 정책과 관행에 따른 도전, 경제 강압, 국가 안보를 위협할 특정 선진기술 보호 등 당연히 중시돼야 할 국제 규범사항들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뒀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G7 회의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중국과의 관계는 디커플링(관계 단절)이 아닌 디리스킹(의존도 낮추기)라고 설명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여러 제품에 대한 중국 시장의 역할과 공급망 사이의 얽힌 수준을 고려할 때 디커플링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직접 언급했다.

미 상무부 발표에 따르면 2022년 미국과 중국 간 교역액이 6906억달러(약 870조원)로 집계됐다. 미국의 대중국 무역적자는 3829억달러(약 483조원)이다. 교역액이나 적자액 모두 사상 최고치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많은 기업들이 세계에서 공장이 가장 많은 중국과의 관계를 끊을 의사가 없거나 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석했다. 미국 정부가 공급망을 재편하고 첨단산업의 디커플링을 강도 높게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은 과도기적이다. 일각에서는 미국 정부의 대중국 무역 규제가 없었다면 미국의 적자 규모는 훨씬 더 커졌을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 미국에 유리한 국면이 가시화될 것이라는 분석도 내놓고 있기는 하다.

이런 가운데 한국과 일본은 미국 정부와 뚜렷하게 손발을 맞추고 있다. 지난 4월 말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양국은 핵심가치를 공유하고 경제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돼 프렌드 쇼어링 관계로 발전할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라고 양국 관계를 정의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히로시마로 초청한 기시다 일본 총리도 윤 대통령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대미관계를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 모두 중국과의 관계를 구태여 배척할 필요는 없다. 6월 초 제주포럼 기조연설에서 한덕수 총리는 “중국은 우리의 핵심 파트너이며 한중일 정상회담이 조속히 정상화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등 중국과 일본의 회의 참가자들은 한중일 3국의 협력을 통한 인도-태평양 지역의 지속가능한 평화와 번영을 역설했다. 관계는 변화한다. 국익 앞에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