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호 2024년 11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미중 갈등과 세력권 질서의 부활
박종희 (대학원98-20) 모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미중 갈등과 세력권 질서의 부활
박종희 (대학원98-20)
모교 정치외교학부 교수
북·러 군사 협력, 자유 진영 위협
한국 위기관리외교 시험대 올라
2023년 2월 유엔총회가 채택한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결의안(A/ES-11/L.7)은 현재 국제질서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한국을 포함한 141개국이 찬성한 이 결의안에 반대한 국가는 벨라루스, 북한, 러시아 등을 포함한 단 7개국에 불과했다. 주목할 점은 중국을 비롯한 32개국이 기권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현재 국제질서가 자유주의 국제질서 수호 진영, 이를 전면 부정하는 진영, 그리고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하는 진영으로 삼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국제질서가 직면한 도전은 크게 두 가지인데, 첫 번째 도전은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세력권 질서의 부활을 꾀하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팽창주의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확립된 국제질서의 근간인 주권평등과 영토보전의 원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였다. 여기에 이제 북한이라는 핵무장 국가가 가세하면서 이 도전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북한의 1만 명 규모 파병은 단순한 병력 지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러시아가 구소련 시절의 영향력 회복을 위해 동북아시아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선택했음을 의미한다. 러시아-북한의 전략적 협력은 세 가지 측면에서 국제사회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첫째, 이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금지하는 결의안에 서명한 바 있으나, 이제는 스스로 이를 위반하고 있다. 둘째, 러시아로부터 획득한 첨단 군사기술은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어서 동북아 안보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 셋째,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혹은 확전 가능성을 높인다.
현재 국제질서가 직면한 두 번째 도전은 자유주의 국제질서 내에서 미국 중심의 질서를 넘어서고자 하는 중국의 도전이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독재라는 정치체제를 유지한 채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특별한 지위를 얻었다. 중국은 한국의 발전국가 모형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민군융합형 발전국가’를 완성했다. 한국의 경우 1987년 이후 민주화와 재벌개혁을 통해 1970년대 민군융합형 발전국가 모델을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중국의 민군융합형 발전국가는 이러한 민주적 통제 장치가 부재하다. 공산당이라는 소수 권위주의 집단에 의해 통제되는 민군융합 체제는 언제든 군사력 확장으로 전환될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시진핑 집권 이후 권력 집중화가 심화되면서 신흥기술로 업그레이드된 중국의 민군융합형 발전국가가 공격적, 팽창주의적 패권 추구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증가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두 도전이 갖는 미묘한 차이다. 중국은 러시아의 세력권 질서 부활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제국주의에 의한 ‘백년국치(百年國恥)’를 경험한 중국으로서는 러시아식 세력권 전략과 거리를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통적 우방인 북한이 러시아와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유럽 전선에 참전하기로 한 결정은 중국에게 전략적 딜레마를 안겨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러시아의 군사적 도발이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후퇴를 가속화하고 내부갈등을 심화시킨다면 중국으로서는 이를 반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중국이 우크라이나 전쟁 관련 유엔 투표에서 수차례 기권하면서도 러시아를 은밀히 지원하는 양면적 태도를 보이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북한군 파병에 대해 아직 침묵하고 있는 중국의 향후 태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국제전화 가능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국내 여론이 우크라이나 전쟁 연루를 경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세력권 부활의 전략적 파트너로 북한을 선택함으로써 한국은 의도치 않게 국제적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한국정부의 신중한 위기관리(de-escalation) 외교 능력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직접 연루되는 것은 피하되, 북-러 군사협력의 취약고리를 파고드는 정교하고 효과적인 외교전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차기 행정부가 북한군 파병 문제를 최우선 국제안보 의제로 다루도록 설득하고 중국과의 전략적 소통 강화, 유엔 안보리 차원의 대북제재 이행 감시 강화, 그리고 러시아의 대북 기술이전 차단을 위한 국제공조를 차분히 준비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유엔과 국제사회를 설득하여 북한이 제재 완화로 가는 단계적 로드맵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